본문 바로가기

독서/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_임승유

어렵고 낯선 시집이었다. 꾹꾹 참으며 읽었다.
사실 오래전에 읽었는데 어떻게 정리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찌됐든 뭐라도 써야겠다는 심정으로 정리를 해 본다.
비유가 낯설다.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익숙한 비유가 아니다.

"바람은 결심할까요 구름은 실족할까요 의자가 주춤 손가락이 주춤 이러다 탭댄스라도 추겠어요"
<오래 사귀었으니까요> 에서
"발목은 허공에게 ... 무릎은 계단에게, 귀는...날씨에게, 눈동자-까마귀, 코-종려나무, 발바닥-길바닥, 입술-태양, 손톱은 ...피아노에게" <어느 육체파 부인의 유언장>에서

그런데 이런 새롭고 낯선 비유, 연상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던지고 만다. 수습하지 않는다. 이런 게 현대시의 주된 흐름일 수도 있겠지만. 하하 내게는 어렵다.

시집은 어떤 일관된 분위기와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해설에도 설명되어 있다.
나도 소녀, 성, 아버지, 가족, 학교. 억압과 일탈의 기호들을 읽었다.
그러나 피해자의 목소리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직접적인 감정 진술 그런 건 하수들이나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객관화와 낯설게 하기를 어떻게 시 안에서 결합시켜야 하는지
그런 결합으로 어떻게 시인의 생각과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임승유 시인의 시집에서 그 답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궁상 떨지 않으면서,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면서, 할 말은 다 하면서, 신박하게 ...
하하하 세상에 쉬운 거 어디있겠는가. 느는 건 정녕 한숨뿐인가.

가끔씩 무심한 듯 드러나는 감정의 선을 더 주목하며 읽었다.
어쩌면 그것이 시인의 의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딱 거기까지이므로

해설을 쓴 박상수 시인(이지 평론가)는 이 시집에 대해 이렇게 썼다.
"해결하지 못하는 자들이 시를 쓴다. 정리할 수 없는 자들이 시를 쓴다. 놓여나지 못하는 자들이 시를 쓴다. 그러나 시를 쓰면서, 혹은 쓰고 난 뒤 우리는 불행 가운데 존재하는 삶의 작은 기척 하나를 손에 쥐게 된다"
시 한 편 한 편이 (직간접적인) 체험과 그 체험을 씹고 씹어 녹여낸 깊은 고민들의 산물일 것이다.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 밀도와 긴장감, 깊은 곳에 가라앉힌 감정이 담겨 있다.
<수화>라는 시에서 나는 '삶의 기척을 쥐려고 하는 시'인의 마음을 가장 크게 느꼈다.

수화

골목에서 노파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들의 손끝에서 붉은 혀들이 번질 때
허공도 붉은 혀를 갖고 있는지
구름 한 점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인들의 몸에서는
빛바랜 냄새가 맡아지곤 했는데
그건 태양이 뱉어놓은 언어가 닳고 닳아서 발음을 할 수가 없어졌기 때문

원시의 동굴을 기억하는 바람이 그렇듯
노파의 일생을 통과해온 숨결은 눅눅하다
혈관과 내장과 떨림으로부터 끌어올린
가로수가 내민 수천 개의 이파리들처럼
세상의 모든 펄럭이는 것들은 사실은 혀일지도 모른다

오래 길들여온 새들이 노파의 손끝에서 날아오르고
구름은 지나가는 중이다
새들은 미리 가서 저승의 안부를 물을 것이고
글썽이는 건 구름의 습성이지만
바람의 일이기도 하다

후두둑
새들이 물어온 소식이 거리를 적시자
사루비아가 붉은 혀를 내밀어
무수히 지나는 발자국에 대해 지껄이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번지는 저 언어들을 어떻게 발음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