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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여러가지

텍스트의 포도밭 _ 이반 일리치

책의 시대가 저물고 영상의 시대다. 이반 일리치는 벌써 1993년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이 시대에 글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지금 일어나는 이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책과 텍스트의 혁명, 읽기의 혁명'이 벌어졌던 12세기로 떠난다.
성 빅토르의 후고가 쓴 <디다스칼리콘>해석하며 지금 막 끝나고 있는 '학자식 읽기'가 시작되었고
'수도사식 읽기'가 끝났던 시기를 탐색한다. <디다스칼리콘>은 수도원생들의 교육을 위해 쓴 책으로
이반 일리치에 따르면 '읽기에 대한 최초의 책'이다.  

나는 전혀 다른 이유로 이 책을 읽게 됐다. 그의 구분법을 내 나름 적용하자면,
(텍스트) 읽기는 이렇게 변했다. 

 : 수도사식 읽기(필사본 책의 시대) → 학자식 읽기 (인쇄 책의 시대) → 유튜브 보기(영상의 시대)

나는 유뷰브 보기는 실용적 필요가 있을때 더러 할 뿐, 주로 학자식 읽기를 해왔다. 
그런데 '예술적' 텍스트 특히 '시'를 읽으면서 자꾸만 학자식 읽기를 하고 있는 나를 만난다. 
천천히 음독하며 읽지 못하고 눈으로 최대한 빠르게 읽으며 핵심과 요점을 파악하고
형식상의 특징을 파악하고 정의, 분류, 비교와 대조 등의 분석틀을 적용하는 읽기!!
이런 읽기는 나의 주관과 판단이 너무 뚜렷해 대체로 편협했고 진정한 이해를 가로막았다. 
정치, 사회, 학문적 판단 이전에 텍스트 그 자체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느끼고 이해하는 책읽기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수도사식 책읽기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알아보고 싶었다. 


[본문 중에서]

<지혜를 향한 읽기>

경건하게 웅얼거리는 사람들의 악보(수도사식 읽기)
→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시각적으로 조직된 텍스트 (학자식 읽기)
수도사식 읽기에서 학자식 읽기로의 이행이 현재에 벌어지고 있는 매우 다른 이행에도 약간의 빛을 던져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구해야 할 모든 것 가운데 첫째는 지혜다. <디다스칼리콘>의 첫문장
후고는 읽기를 존재론적인 치료 테크닉으로 인식하고 해석했다.
우리는 공학의 정신에 물들어 있어서, 방아쇠를 과정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총알이 궤적을 그리며 나아가는 원인이 마음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뉴턴을 따라 살고 있다. 떨어지는 돌을 보면 그것이 중력에 사로잡혀 있다고 인식한다. ... 땅의 가슴에 가능한 한 가깝게 다가가고자 하는 돌의 자연스러운 욕망은 우리에게는 신화가 되었다. 첫째가 되는 또는 제1의 최종원인, 돌이나 식물이나 읽는 사람의 본성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욕망을 움직이는 궁극적인 하나의 이유가 우리 세기에는 이질적인 것이 되었다. 
(수사의) 수련의 시작은 겸손이다. ... 겸손이 읽는 사람에게 가르쳐주는 특히 중요한 교훈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어떤 지식이나 글도 경멸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어떤 사람에게 배우든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스스로 배움을 얻었을 때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후고가) 만난 책은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인쇄된 책) 특유의 느낌이 전혀 없었다. 페이지는 여전히 종이가 아니라 양피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반투명의 양 또는 염소 가죽에 손으로 쓴 문자가 덮여 있었으며, 가는 붓으로 그린 세밀화로 생기가 감돌았다. '완벽한 지혜'의 형상은 이 양피지를 통하여 빛나고, 문자와 상징이 빛을 발하게 하고, 읽는 사람의 눈에 불을 밝힐 수 있었다. 책과 마주하는 것은 .... 동트기 전에 돌 아치 사이를 검게 채워 넣은 것처럼 보였던 스테인드글라스의 색깔이 해가 뜨면 살아나는 것이다. 
후고는 독자에게 페이지에서 발산하는 빛에 자신을 드러내라고, 그리하여 자신을 인식하라고, 자신의 자아를 인정하라고 권한다. 
우리가 오늘날 일상 대화에서 '자아' 또는 '개인'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바는 12세기의 위대한 발견으로 꼽힌다. ... (후고는) 읽는 사람이 페이지를 마주보고, 지혜의 빛에 의해 그 양피지라는 거울에서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기를 바란다.   
오늘날 우리는 서로를 경계가 있는 사람들로 생각한다. 우리의 인격은 우리 몸만큼 서로 떨어져 있다. 공동체와 내적인 거리를 둔 존재는 우리에게 하나의 사회적 현실...이다. 우리는 망명자들의 세상에 태어났다. ... 이런 존재의 경계는 우리가 사는 이러한 세계에서 자기 자리를 찾고 싶은 사람에게는 핵심적이다. ... 그것이 어린 시절에 한 사람의 정신적 지형을 형성해버리면 그런 존재는 그 자신과 같은 망명자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제외하면 다른 모든 '세계들'에서 영원히 이방인이 되기 마련이다. 
보통 이런 경계는 개인, 페르소나의 새로운 의미이자 그 사회적 인정으로 후고의 시대에 등장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후고는 읽는 사람을 낯선 땅으로 이끈다. ... 예루살렘이나 산티아고를 향해 이곳저곳을 떠돌며 길에서 돌아다니라고 권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유배시켜 책의 페이지를 통과하는 순례를 시작하라고 청한다.  
후고가 보기에 깨달음은 세 쌍의 눈에 영향을 준다. 먼저 육의 눈은 ... 물질적인 것들을 발견한다. 정신의 눈은 자아와 자아가 비추는 세계를 관조한다. 마지막으로 마음의 눈은 '지혜의 빛'속에서 하느님의 가장 깊은 곳으로 뚫고 들어가는데, ... (거기에는) '아버지'의 무릎에 놓인 궁극적인 '책'으로서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아들'이 있다.  

<질서, 기억, 역사>

솔직하게 이름을 모르고는 그 사물이 본성도 알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매일 내 작은 지혜(지식의 부스러기)를 몇 번씩이나 반복했던가 ... 늘 공책에 적어 놓았다. .... 앞으로 도약하고 싶어 곤두박질치는 사람이 아니라, 한 계단씩 움직이는 사람이 가장 잘 움직이는 사람.
상징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여주려고 보이는 형태들을 모으는 것
읽는 사람의 과제는 창세기부터 묵시록 사이의 이스토리아(역사) 가운데 자신이 읽는 모든 것을 그것이 속하는 각각의 지점에 집어넣는 것이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읽는 사람은 읽기를 통하여 지혜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말하고 싶은 문장들을 마음속으로 준비하는 기술 ... 그리스인이 사용한 가장 흔한 방법 중 하나는 머릿속에 기억 궁전을 짓는 것이었다. ... 기억을 찾아 꺼내 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학생에게 익숙한 정신적 라벨을 각각의 기억에 하나하나 붙이는 것이라는 사실은 일찌감치 발견되었다.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은 역사, 알레고리, 비유 속에서 그 적절한 질서를 찾아야 한다. ... 공부의 순서에서 이 셋 가운데 어느것이 다른 것에 앞서는지 물어야 한다. ... 독서는 3단계 구축 프로그램이다. 첫째로 [자구적] 기초가 놓이고, 그런 다음 그 위에 [유추의] 구조가 올라가고, 이런 작업이 끝나면 마지막으로 건물에 색을 입힌다. 
역사는 이루어진 일들의 이야기로, 우리는 그것을자구적 의미로 본다. 알레고리는 이루어진 것을 통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어떤 다른 것의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 비유는 이루어진 것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의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 

<수사의 읽기>
묵상은 계획된 선을 따라 유지되는 생각이다 ... 묵상은 읽기에서 출발하지만 읽기의 규칙이나 교훈에 얽매이지 않는다. 묵상은 넓게 트인 땅을 따라 거니는 것을 즐거워하며, 그곳에서 자유롭게 시선을 돌려 진리를 응시하고, 한 번은 사물의 이런 원인들을 또 한 번은 저런 원인들을 모으고, 깊은 곳으로 파고들며 의심스러운 것, 모호한 것은 전혀 남기지 않는다. 따라서 배움의 시작은 읽기에 있지만, 그 절정은 묵상에 있다. 
눈으로 읽는 사람에게 과거의 이런 증언(책을 소리내어 웅얼거리며 읽고 듣고 몸을 흔들고 ... 오감을 활용한 책읽기)은 충격적일 수 있다. 눈으로 읽는 사람은 입으로 읽는 읽기가 모든 감각에 영향을 줄 때 생겨나는 경험을 공유할 수 없다. 게다가 맛과 냄새를 표현하는 어휘는 시들고 움츠러들었다. 
후고는 읽을 때 수확을 한다. 행들로부터 열매를 딴다. 그는 파지나pagina, 즉 페이지라는 말이 함께 나란히 놓인 포도밭 이랑들을 가리킬 수 있다는 점 ... 페이지의 행은 포도를 지탱하는 포도 시렁의 줄이었다. 그가 양피지 책장에서 열매를 딸 때 그의 입에서는 보체스 파지나룸(페이지의 목소리)이 떨어진다. 자신의 귀를 위한 것이라면 소리 죽은 중얼거림이 되고, 수사들의 공동체에게 말하는 것이라면 렉토 토노(암송)이 된다. ... 고대 전체에 걸쳐 읽기가 힘든 운동으로 여겨졌던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리스 의사들은 구기(공놀이)나 산책의 대안으로 읽기를 처방했다. ... 약한 사람이나 병자는 자기 혀로 읽을 수 없었다. 
고전시대의 웅변가, 소피스트, 수사에게 읽기는 몸 전체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수사에게 읽기란 한 가지 활동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 방식이다. 특정한 규칙에 따라 무엇을 하든 수사는 읽기를 계속한다. 

<라틴어 '렉티오'(낭독)>
후고의 학생들은 ... 읽기, 쓰기, 라틴어가 모두 어떤 큰 것의 부분이라고 여겼던 중세의 마지막 라틴어 학자들이었다. 라틴어는 그들의 생전에 여러 언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다음 세대 학생들은 라틴 운문과 더불어 자기 나라 말로 시를 썼다. 
12세기가 동틀 무렵 태어나 라틴어로 표현하지 않으면 구술할 수도 없고 글을 쓸 수도 없고 마음의 가장 깊은 움직임을 정리할 수도 없었던 플랑드르인 후고와는 달리, 13세기가 동틀 무렵에 태어난 이 움브리아 상인의 아들은 해와 달을 찬양하는 마음을 토착어 사랑 노래로 쓸 수 있었는데, ... 물론 그는 로마자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 단어 한 단어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 지혜를 향한 후고의 순례가 라틴어 행들의 사다리를 올라간 반면,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의 거리 모퉁이에서 자신의 벌거벗은 자아를 드러냈다. 

<학자의 읽기>

12세기 말이 이르면, 책은 우리 시대까지 유지되는 상징성을 띠게 된다. 책은 전례 없는 종류의 물체, 눈에 보이지만 만질 수 없는 물체, 앞으로 내가 책 중심적 텍스트라고 부르는 것의 상징이 된다. 알파벳의 오랜 사회사에서 이런 발전의 영향에 비견될 만한 것은 오직 두 가지 사건밖에 없다. 하나는 완전한 표음문자의 도입 ... 또 하나는 15세기 인쇄술의 확산으로, 이로써 텍스트는 문학적이고 과학적인 새로운 세계관의 강력한 틀이 되었다. 
말의 기록에서 생각의 기록으로

<책에서 텍트로>
 
자연 자체가 읽어야 할 대상에서 묘사할 대상으로 바뀌었다. 설명과 해석은 세계라기보다는 텍스트에 대한 작용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제야 자연을 암호화된 정보로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세계의 가독성'에 대한 역사가 연구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 텍스트는 사본을 원본과 구분하는 공간을 통하여 의미 있는 기호들을 실어 나르는 일종의 배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이 배는 여기저기에 닻을 내린다. 그러나 텍스트와 페이지의 이런 분리에도 불구하고 텍스트는 책 안에 항구를 유지하고 있다. 책은 또 은유적으로 텍스트를 위한 항구 역할을 하며, 텍스트는 여기에 의미를 내려놓고 보물을 드러낸다. 수도원이 신성한 책의 문화를 위한 세계였듯이, 이제 대학이 새로운 책 텍스트를 위한 제도적 틀이자 상징적 교사로서 등장하게 된다. 
책은 이제 자연이나 신을 내다보는 창이 아니었다. 이제 읽는 사람이 피조물이나 초월자에게 다가가는 투명한 광학 장치가 아니었다. 책은 여전히 광학도구이기는 했지만, 마치 볼록렌즈가 오목렌즈로 대체된 것처럼 180도 전환이 이루어졌다. 우주적 실재의 상징으로부터 생각의 상징이 생겨났다. 이제 책이 아니라 텍스트가 생각이 모이고 거울에 비추어지는 물체가 되었다. 

[책을 읽고 든 생각들]

온몸으로 느끼며 받아들이는 수도사식 책읽기를 계속 생각했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구하고, 논리가 아니라 마음을 이해하고, 책을 쓴 그리고 읽는 개인(사회속의)을 생각하는 읽기. 눈만 아니라 입과 귀와 몸통의 흔들림으로, 즉, 온몸으로 읽겠다고 다짐했다. 읽으며 또는 읽고 묵상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새삼 깨닫는다. 

다소 뒷부분에 나와 있는 학습방법에 대한 부분이나 라틴어, 알파벳에 대한 부분에서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다. 큰 관심사도 아닐 뿐더러. 내용도 다소 전문적이고 지나치게 구체적이어서 큰 맥락을 견지하며 디테일까지 이해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졸렸다. 

수도사들은 커다란 교회공동체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개인과 만난다. 하나님은, 진리와 지혜는 집단이 공동으로 성취하는 게 아니다. 개인들이 끊임없는 자기 수련, 읽기를 통해,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속에서 만나게 된다. 인도의 승려들의 깨달음도 그렇다. 르네상스나 근대적 브르주아적 '개인' 이전, 12세기에 벌써 '개인'의 탄생이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검색해 보니, <개인의 발견>이라는 책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  
개인의 발견이 가능했던 것은 '사회, 공동체 속의 이방인'이라는 존재인식때문이다. 많이 들어본 말이다. 그렇다. 까뮈의 <이방인>이다. '개인'도 샤르트르의 '실존'과 이어진다. '실존주의'는 분명 세계제2차대전의 산물이지만, 실존을 고민하는 개인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실존에 대해 고민하는 개인은 (중세시대에는 지혜/신앙을 고민하는 개인일 것이다, 내 경우, 예술을 고민하는 개인이 될 것이다) 외부세계의 부조리에 직면한다. 그리고 내적인 소외감에 휩싸인다. 자신의 부족함에 직면한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텍스트'를 읽는다. 개인은 지혜와 영감을 열망한다. 자유와 평등을 꿈꾼다. 
개인은 개별적, 고립적 개인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개인을 사회적 존재라고 봤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을 파악했다. 그렇다고 개인이 공동체, 사회속에 녹아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꿈꾼 공산주의 사회는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체'다. 나는 이말에서 개인과 자유와 연합의 가치를 모두 담는 '아나키즘'을 꿈꾼다.  
개인과 실존,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 아니키즘은 계속 되는 내 화두다. 정리는 좀처럼 되지 않고 읽어야 할 책 목록만 쌓여간다.  
사회과학적 방법론(대표적으로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을 뛰어 넘고자 나는 이 책을 들었다. 앞으로 입으로 중얼거리며 오감을 활짝 열고 읽어야겠다. 텍스트 하나하나가 아니라 전체를 관통하는 마음을 읽어야 겠다. 나는 학자가 되고 싶지 않다. 될 소질도 없다. 나는 예술을 통해 삶의 진실을 찾는 '수도사'가 되고 싶다. 소질이 없어도 어쩌랴. 시대의 흐름과는 한참 동떨어졌다. 또 그런들 어떤가. 그것이 나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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