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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여러가지

카페의 아나키스트 사르트르

한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박홍규 교수가 쓴 책이다.
고3, 아마도 내 생애 가장 민감했던 시절, 심취했던 샤르트르
자유를 위하여 권력과 권위에 대한 저항이라는 그의 가르침은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정신에 올곧이 새겨져 있다.
실존과 의식의 상호작용.
실존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대상화, 객관화 시키고
조건과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대응하는 의식을 탐색하는 방법
삶의 태도이자 방법을 나는 바로 사르트르를 통해 얻었다.
윤동주의 시가 내 마음을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이었다면
사르트르의 소설은 내 실존을 헤아려 자유를 외치는 것이었다.


철저한 개인의 판단, 선택으로 나 자신을 미래에 던지기
스무살 안팎의 청년이 사회운동에 몸 담을 수 있도록 이끈 삶의 태도였다.
이것은 내게 너무나 깊숙히 뿌리 박혀 있어서 돌이켜보면,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이고 나서도
끝임없이 사회주의사상과 조직 그리고 활동에서 갈등을 겪는 핵심 원인으로 작용했다.
실존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사르트르는 정말 아나키스트일까?
그런데 왜 거리, 숲속, 공장의 아나키스트가 아니라 카페의 아나키스트인가?

사르트르와 아나키즘을 묶어서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를 동감한다.
지금 내 삶의 태도를 가장 잘 표현하는 그 둘을 어떻게 연결시킬지 궁금해서 이 책을 들게 되었다.

사르트르의 사상과 실천은 아나키즘과 관련이 깊어.
스스로도 몇 차례 인터뷰에서 아나키즘에 대해 직접적으로 또 우호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그의 모든 면모를 아나키즘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만 보는 것에는 의문이다.
박홍규 교수의 장점이자 큰 단점은 모든 것을 아나키즘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것.
사회주의 단체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특정 사상/이론의 렌즈를 통해서만 세상을 보려고 하는 태도와 유사하다.
렌즈는 화각이 좁은 망원렌즈가 있고, 또 화각이 넓은 망원렌즈는 왜곡 현상이 나타난다.
어떤 렌즈도 세상 전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다.
그런데 오직 렌즈를 통해서만 세상을 보려한다면, 렌즈가 포착하지 못한 세상은 무시할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눈에 보이는 세상은 세상의 극히 일부다.
나는 사르트르가 아나키즘적 사상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를 박홍규교수처럼 아나키스트라 단정하지는 않겠다.
그는 특수한 역사적 산물인 실존주의자다. 굳이
그의 아나키즘에 촛점을 맞추자면 실존주의적 아나키즘,
혹은 아나키즘적 실존주의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그의 실존주의는
파시즘과 전쟁 속에 거대 이념,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야만에 대한 개인과 실존의 대응이다.
그 실존은 당연히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개인의 자유를 추구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존의 조건은 (대자적) 의식에게 끊임없는 선택을 요구한다.
사르트르의 선택은 정치적 실용주의였다. 순수한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지 중에 좀더 나은 것을 취했다.
파시즘에 맞서 절대적 평화주의를 버렸고, 제3세계 민족해방 문제를 둘러싸고 프랑스 공산당과도 협력했다.
순수하고 절대적인 아나키즘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한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다.
전략과 전술 문제를 둘러싸고 수 많은 아나키즘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본문 내용]
: 요약은 순서 없이 내가 정한 소제목에 따라 했고 때로는 짧은 코멘트가 들어 있기도 함.

<실존주의>
인간에 대해 어떤 헛된 본질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책임으로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살아가는 태도 - 실존주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는 (개인주의적 인간관)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런 인간관을 '타자와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비판하면서도 공동체론을 회피하며, '복수성', '다원성'을 확보하고자 ... 따라서 사르트르는 결코 개인주의자도, 공동체주의자도 아니다. 굳이 명명하자면 복수주의자, 다원주의자이다. 즉, 인간은 모두 실제로 각각 다르다는 것... 인간들은 모두 제 각각이고, 그들 모두는 자유로워야 하며, 각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실존주의란 그런 것이다.
사르트르는 흔히 인간주의로 번역되는 휴머니즘이나 공산주의에 적대적인 입장이었다. ... 1945년 이후에는 실존주의를 보편적인 의미에서 휴머니즘이라고 했다.
- 실존주의의 유행 / 포스트모던파 (바타유, 블랑쇼, 아르또 등 개인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통합하고자 하는 이념을 철저히 파괴. 현실 참여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음) / 휴머니즘파 (카뮈, 말로 등, 개인의 다양성을 통합하려는 역사의 이념을 비판하면서도, 공통의 인간성이나 인간의 존엄을 믿음. 적극적으로 권력에 저항. 하지만 권력 저항에는 한계-카뮈의 (알제리) 정치적 침묵, 말로의 드골좌파 참여) / 기독교파 (가브리엘 마르셀 등) / 마르크스주의파 (사르트르, 보부아르, 장송 등, 이념과 인간 해체는 포스트모던파와 가까우나 정치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실존주의는 인권사상의 문제점과 식민지에 대한 제국침략을 비판하는 아나키즘에서 비롯됨을 주목해야 한다. '인권'과 '제국'이라는 '전체의 이념'에 의해 무시되고 유린된 프랑스 민중과 식민지 사람들의 구체적인 개별적 '실존'이 그런 '전체의 이념'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한 것이 실존주의. 아니 '전체의 이념'이라는 것을 아예 부정하고 개인의 '실존'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경우에 대해서도 사르트르는 그것이 개별의 실존을 무시하는 전체주의라는 이유에서 찬성하지 않았다. 제국주의나 사회주의나 '역사의 이념'이라는 허위의 장치를 세우고, 전체의 이름으로 개인을 죽이고 착취하는 만행까지 일삼는 것이었으므로 언제나 개인의 '실존'을 중시하는 사르트르로서는 그 어느 경우에나 반대했다. ... 나치 침략이라는 무서운 현실이 닥쳐오자 그는 절대적 평화주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됨.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어떤 속성으로 결정되기 이전에 모든 사물처럼 개별적으로 실존한다. 즉, 우리는 이 세상에 스스로의 의사와 무관하게 던져졌으므로, 어떻게 되어야 하는 식으로 규제된 목적적 존재가 아니라, 실존이란 우리 자신을 미래에 던지는 것이고, 그 결과 본성은 결코 똑같이 일치될 수 없으며, 항상 형성되는 과정에 있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자유롭게 우리의 존재 여부에 대해 책임을 지고,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 결국 사르트르가 옹호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예술작품이다'라고 하는 하루하루의 창조물로서의 개인적인 삶이었다.
집단 내의 공동체 개인은 집단-내-존재로서 공동체의 규약을 자신의 자유 구조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사르트르는 '자유의 필연성'이라고 부른다. 이는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지만, 공동체에 대한 각자의 참가는 자유이기 때문에 필연성으로서의 자유이다. ... 개인적인 실천은 모든 실천의 기초이고, 그것은 공동적 실천과 동질적인 것이 된다.
인간을 의식과 행동의 자유로 보고 인간관계를 자유로운 의식과 행동의 만남으로 보며 그 선택에 의해 책임을 지는 것이 참여라고 보았다. 그가 문학의 참여를 주장한 것은 문학이 사회참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인간, 특히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문학은 그 자체가 참여적인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끝없이 비판을 받아 재검토되지 않는 지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고, 자신이 사는 정치 사회에 의문을 던지지 못하면 자유인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르트르는 평생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에 의문을 던진 사람이다. 즉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실존주의와 공산주의>
사르트르는 작가의 침묵을 비판하고 문학의 사회참여를 주장했다. ... 보수주의는 사르트르가 문학을 정치에 종속시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재판이라고 비판하고, 공산주의는 공산당 밖에서 노동계급의 해방을 주장함은 노동계급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난했다.
공산당 이론가 가로디가 사르트르를 대중으로부터 초연하다고 비판하자, 사르트르는 가로디가 공산당 속에서 생각 없는 안전을 추구한다고 비판했다. 즉 당원은 위험도, 걱정도 없으며, 모든 것이 확실하고, 결과까지 보장되어 있는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 책임에서 도피하고 독립적으로 자유를 성취하려는 위험보다는 당의 규율을 택했다고 확신했다.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엄격히 사회주의적 원칙에 입각하지 않은 모든 해결책을 배척해야 하는 동시에, 사회주의를 절대적 종점으로 생각하는 모든 교리와 운동을 배척해야 한다. .... 사회주의는 완전한 종점이 아니라 시작의 종점이다. ... 그것은 인간이 자유를 소유하게 되는 종점 이전의 마지막 수단이다.
루카치는 <실존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에서 실존주의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고 일축. 사르트르는 루카치의 마르크스주의가 반변증법적이고 교조적이라 반박.
실존주의와 마르크시즘은 같은 대상을 목표했으며, 마르크시즘이 인간을 이념 속에 흡수시킨 데 반해 실존주의는 '인간이 있는 모든 곳, 인간의 노동현장, 그의 집, 거리 등 어디에서나 인간을 찾는다'
마르크스주의적 방법은 생산과 생산관계로부터 사회집단에로, 거기에서 개인에로 전진적이고 종합적인 방법을 취함에 비해, 실존주의는 먼저 개인에서 출발하여 실천적 다양성의 모순과 투쟁을 통하여 역사적 인간이라고 하는 절대적 구체를 본다.
어떤 희생적 정신이나 헌신의 이념에 의한 운동은 회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정치나 운동이 이념에 기초하는 것은 언제나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그 이념이 개인의 개체성을 희생하거나 헌신을 요구하는 논리를 내제하는 경우 위험하다고 보았다. ... 이념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에 대항하여 구성원의 끝없는 반역에 의해 유동화 하는 연합을 구상했다. 따라서 자코방주의적 중앙집권주의를 비판하고 당시 바스크 지방 등에서 대두한 다양한 형태의 지역주의 운동과 지역주의를 회피한 지방분권의 연방주의를 지지했다.

<초현실주의>

학창 시절 사르트르는 초현주의주의자 ... 이성, 보편, 국가, 조국, 문화, 의무, 군대, 복종, 현실 등을 섬기는 기존 체제에 대해 격렬한 적대감을 갖는 것은 당연했고, ... 문학을 비롯한 예술의 혁신만이 아니라 사회의 혁신을 추구한 것도 당연 .. 이성에 대한 무의식의 우위. 보편에 대한 개별의 절대성, 국가에 대한 부정과 반역, 조국이라는 관념의 해체, 프랑스 문화의 부정, 의무의 포기, 반군국주의와 군대 해방, 절대적 반항, 초현실의 신비주의 등을 추구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사회참가 계기는 1925년 모로코의 독립투쟁 ... 주류 측은 프랑스 식민통치를 아프리카에서 진보와 인도를 실천하기 위한 위대한 의무라고 주장 ... 브르통, 아라공, 엘뤼아르 등 초현실주의자들은 1927년 공산당에 입당. (아라공, 엘뤼아르는 곧 탈당, 브르통은 트로츠키파에 합류)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브르통이 트로츠키주의에 접근한 것은 '궁지에 몰리고 소수화된 트로츠키주의는 아직도 비판적 부정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 ... 만일 그것이 하나의 체제로 된다면 양자의 제휴(초현실주의와 트로츠크주의)는 즉각 파탄되었을 것이라고 지적

<앙드레 지드>
반나치활동 ... 그는 프랑스인이면서도 국제주의자일 수도 있고, 공산주의자이면서도 개인주의자일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하고서, 각자가 어떤 타부도 없이 자유롭게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혁명에도 기여하며, 또한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 특수성을 상실하지 않는 각국의 훌륭한 문화를 공유하고, 옹호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소련이 ... 하나의 실천적 성과라고 주장했다.
1936년 6월 소련의 실태를 본 뒤 <소련기행>을 써서 소련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공산당을 탈퇴했다.

<하이데거>
'세계-내-존재'로서의 의식적 실존이라는 생각, 의식적 존재의 세계와 사물 세계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 부조리하게 실존으로 던져진 존재라는 생각, 불안, 무, 주체적 실존과 비주체적 실존의 구별, 사실성과 초월의 구별, 미래로 던져감으로써 자신을 만드는 인간이라는 생각 등은 사르트르가 하이데거에서 물려 받은 것. 하이데거는 나찌에 협력.

<구토>
: 이 소설에 대해 정리한 내용은 요약에서 제외한다. 조만간 소설을 다시 읽고 스스로 서평을 쓸 생각이다.
로캉탱은 '나는 휴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 공산주의자들의 비판에 대해 ... 인간을 어떤 식으로든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인간에게 그 존엄과 가치와 자유를 회복시키고자 하여 그 전제로 인간을 무의미하고 무용한 존재로 본 것이며, 인간은 언제나 스스로 자신을 선택하고,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은 언제나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라고 주장. 사르트르가 부정하는 휴머니즘은 자코뱅주의의 그것을 말한다.
<구토>는 당시의 프랑스 사회를 지배한 지도자의 휴머니즘에 대해 사르트르가 끊임없이 구역질을 느끼면서도 새로운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소설이다. 그것이 1945년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주장을 낳게 한 것이다.

<카뮈와 사르트르>
카뮈보다도 사르트르가 더욱 멀게 느껴질 수 있다. 카뮈는 사르트르와 달리 노벨상을 감격스럽게 받았고 정식으로 결혼도 했으며 자기 어머니가 살고 있다는 이유로 알제리의 독립에도 반대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주인공들은 무미건조한 도시의 거리, 그 곳에서 앞날이 없는 허무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우주적이고 지중해적인 우애가 있어 인간과 세계의 혼인이 이루어지는 카뮈의 세계 ... 사르트르에게는 우주도, 바다도, 영원도, 신앙도, 아무 것도 없다. .. 있다면 '의식'뿐이었다.
못생긴 얼굴과 등허리가 굽은 157의 사르트르와 177 미남 카뮈는 대조적이었다. 사르트르는 카뮈의 빈정거리는 말투와 행복에 대한 취향 그리고 노골적인 음담패설을 좋아했다. 그리스 vs 독일, 예술가 vs 철학자.
카뮈 - '독일인들은 조국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한다고 말하지만, 실령 조국이 아무리 위대하도고 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정의가 있어야 조국도 있으며,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것은 인간뿐"
1951년 장송이 카뮈의 <반항인>비판을 <현대>에 싣자, 카뮈가 편집장인 사르트르를 상대로 <현대>가 소련 강제수용소 문제를 무시했다고 비난. ... 사르트르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고 이미 <현대>지는 소련 강제수용소 문제를 철저히 비판했고. .. 수용소를 용납할 수 없지만 그것을 이유로 프랑스 식민통치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르트르, 카뮈, 메를로-퐁티 논쟁은 ... 그들은 모두 자본주의국의 식민주의나 소련의 전제주의를 비판했고, 미소 어디에도 편들지 않는 중립의 유럽을 희망했다. ... 자본주의의 폐해를 시정하는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긍정했고, 동시에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도록 요구했다. 그런 사회운동이 ... 공산당에 회수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당시의 냉전구조가 그들에게 이런 제3의 길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각자 나름의 길을 갔고 여기서 논쟁이 생겨났다. 카뮈는 자신의 아나키즘 원리의 가치판단에 따라 침묵을 택했다. 메를로 퐁티는 마르크스주의와 공산당이 내부혁신을 하면 자신의 정치이념과 가까워지리라고 기대하였으나 좌절했다. 사르트르는 메를로-퐁티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걸은 길을 다시 걸어 결국 실패했다.
1960년 카뮈가 교통사고로 47세로 죽었다. ...사르트르 조사 ... '불화, 그것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에 비하며, 함께 살아가는 한 방법에 불과할 뿐 아무 것도 아니다.'

<아나키즘>
좌우익을 함께 전체주의로 거부하고 제3의 길로 실존주의를 모색한 자체가 바로 아나키즘이었다.
나는 지도자가 아니며,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명령을 하는 것이나 복종을 하는 것이나 결국은 같은 것이다.
나치스, 괴벨스의 소설 '권위에 대한 숭배와 지성에 대한 불신' 괴벨스는 이성이란 공동체에 대한 장애물이자 개인을 고립시키고 의지를 마비시키는 것.
<자본론>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었으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의 책 ... 나를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나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던 것은 마르크시즘의 현실, '겪고, 실제로 체험하면서' 멀리서나마 쁘띠 부르주아 지식인들을 저항할 수 없는 마력으로 이끌던, 나의 지평으로 다가온 어둡고 거대한 노동자 대중의 묵직한 현존이었다."
아나키즘은 흔히 비정치주의라고 하나, 이는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정당에 속하거나 권력을 잡지 않는 것을 뜻하고, 도리어 철저히 비판하는 것을 말할 뿐이다.
자본의 논리와 식민지주의에 물든 보수세력을 정치적으로 유효하게 비판하기 위하여 마르크스주의와의 연대를 모색하는 정치적 실용주의의 입장을 취했음.
사르트르는 모든 권위를 해체했다. 서양 근현대의 부르주아적 권위는 물론 전통적인 부모의 권위, 교사, 대통령을 위시한 모든 정치권력, 권력 자체의 권위, 자본주의, 종교, 문화, 노벨상, 문학, 사상, 철학의 권위 등등 ... 심지어 인간의 권위, 가정, 결혼, 집단, 돈의 권위 등 자본주의적인 모든 사회생활의 권위와 가치를 깡그리 부정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아나키스트였다.
사르트르의 경우 자연과 생태는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문학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고 특히 자연에 대한 사랑을 끝없이 노래한 카뮈와 비교하여 그렇다는 비판도 있다. 나 역시 아나키즘을 자유, 자치, 자연으로 파악하는 차원에서 그가 자연에 무관심한 점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느껴왔다.

<호텔과 카페, 그리고 여행>
평생을 대부분 허름한 호텔 꼭대기 5층에서 살았던 사르트르에게는 장대한 서재커녕 방안에 책 한 권이 없었다. .... 우리 같으면 싸구려 여인숙 같은 곳에 몇 달 씩 싼값으로 머무는 식이었 .... 그는 가정집을 싫어해 싸구려 호텔에 살았다. ... "소유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지" ... 호텔 방의 익명성을 좋아했다. 아무도 그곳을 모르고, 자신들조차 쉽게 잊어버리는 그곳의 번호가 주는 무명성을 좋아했다. ... 나그네의 익명성에서 나오는 자유의 감각을 사랑했다. .... 언제나 떠나갈 손님이었고 정처 없는 유목민이었다. 언제나 여행객이었고 어디에도 체류하지 않았다. ... 평생을 떠돌며 ... 살다가 유언장 하나 없이 죽었다. ... 자신이 다 읽은 책이란 시체에 불과했기 때문에 쓰레기처럼 즉시 버려졌다. ... 그의 책에는 인용이 거의 없다. ... 그는 철학책도 소설책처럼 썼다. 강물처럼 흐르는 사색을 그대로 적은 것이었다. ... 호텔을 이동하듯이 그는 세계를 떠돌았다. 물론 호화여행이 아니라 노숙을 하거나 기차에서 밤을 새는 고행이었다. ... 그에게 여행이란 관습과 구속으로부터의 해방과 새로운 세계의 만남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상송 가수를 위해 상송 가사를 썼고, 좋아하는 여배우를 위해 희곡을 썼으며, 심지어 소설도 철학서도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 썼다고 말했다.
... 술에 만취해 춤을 추기도 즐겼다. ... 사르트르는 언제나 웃는 사람이었다. ... 그는 진지하게 살지 않는다는 것을 삶의 모토로 삼았다. 그에게 삶이란 하나의 게임이었다.
키는 157cm로 서양에서는 눈에 띄게 단신이었고, 비만한 체형이었다. 얼굴은 추했고 사팔뜨기여서 금방 눈에 띄였다.
젊은 날에는 미녀를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추악함을 초월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 화려한 여성편력을 낳았다. ... 지식을 통해 그런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했다.
대학시절에는 1년에 3백권의 철학서를 읽었다.
카페는 언제나 열려 있다. 사르트르도 언제나 열려 있다. 그에게는 비밀이 없다. 카페의 사르트르는 거리의 사르트르였다. 그는 거리의 '철인'이었다. 동시에 거리의 작가였다. 그는 평생을 거리에서 살았다.
날 것을 못 먹었다. ... 조개류나 야채도 못 먹었다. 토마토, 조개, 굴, 갑각류, 식물성 식품을 절대 먹지 않거나 싫어하고 익힌 고기나 익힌 채소나 계란 프라이, 돼지고기 가공품을 좋아하는 편식을 했다.
시골의 자연보다도 도시의 꾸며진 아름다움을 좋아했다. ... 그가 세상을 본 것은 오로지 책을 통해서였다.
에콜 노르말(교사(수)가 될 이를 가르치는 대학교)에서 사르트르는 수업에는 별로 참석하지 않고 기숙사에서 아침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공부하고 식사 뒤, 오후 5시부터 9시까지 하루 8시간 규칙적으로 공부하는 버릇을 익혀 평생 그것을 지켰다.
사르트르는 공립초등학교에 다녔는데, 할아버지는 서민과 멀리 하기를 바래 교사는 그를 교탁 옆에 앉혔다. 이듬해 영재학원에 입학했으나 한 학기로 끝났다. .. "너무 귀염받는 어린이는 슬프지 않다. 그러나 그는 왕처럼 심심하다. 개처럼 말이다".. 사르트르는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 ... 아파트 맨 꼭대기 6층에서 홀로 책읽기와 글쓰기에 몰두 ... 부르주아 가정의 허영과 위선에서 비롯됨. .. 외조부모는 어린이 사르트르의 건강조차 무시해 오른쪽 눈에 이상이 생겼음을 몰라 치료를 해주지 않아 결국 사팔뜨기로 만들어 버렸다.
중학생때 어머니 재혼, 의부는 조선소 공장장. 파리에서 라 로셀로 전학. 의부 공장의 노동자들의 자녀들인 거칠고 가난한 시골아이들 사이에서 학교를 다님.
브레송 사진집 <하나의 중국에서 또 다른 중국으로> 서문 ... 이 사진첩은 통지서이다. 이것은 관광주의의 종말을 예고한다. 빈곤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결코 아름다움으로 여겨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 책은 우리에게 조심스럽게 과장 없이 보여준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특히 키부츠에서 그들이 꿈꾼 아니키즘의 구체적인 실현과 완전한 남녀평등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파리로 돌아온 뒤 5주되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새로운 전쟁이 터졌다.
사르트르가 인정한 유일한 인간관계는 보부아르나 친구들을 포함하여 레지스탕스와 같은 동지의 관계였다. 사실 그는 평생을 그런 레지스탕스로 살았고, 그 레지스탕스를 함께 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으며, 그런 레지스탕스가 아닌 사람들과는 만나지 않았다. ... 레지스탕스란 자유를 위한 반항이다.
몽마르뜨르의 '카페 드 라 누벨 아테느'는 새로운 아테네라는 뜻인데, 마네, 반 고흐, 투루즈-로트렉 드가 등이 모인 새로운 예술의 발상지였다. 20세기에 와서 예술가들은 집 값이 싼 곳을 찾아 몽파르나스로 옮겨 그곳은 세계의 교차점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자본주의가 본격화한 1920년경에 가난한 예술가의 카페 시대는 끝나고 카페는 부르주아로 들끓기 시작했다. ... 1950년대에 카페는 다시 지성의 터로 태어났다. ... 실존주의자들이 모인 생 제르망 데 프레의 '카페 드 프로르'였다. ... 카페는 사상, 문학, 예술, 생활이 하나로 된 곳이다. 환상과 현실이 만나, 생각지도 못한 것을 생각하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난다. 그들은 보헤미안이다. ... 카페는 레스토랑이지 다방이 아니다. 밥도 먹고 술도, 커피도 마시기 때문이다. 밥도 하루 세끼를 다 먹는 것이 보통. .. 하숙집 식당이나 월 식당 같은 곳... 독서도, 집필도, 전시도, 그리기도, 낭독도 했다.

<프랑스>
톨레랑스란 프랑스 국민 내부에서, 그것도 상부지배계층에게나 제한적으로 인정된 것이지, 하부 피지배계층, 특히 식민지 원주민에게는 전혀 인정되지 못했다. 피지배자들에게 톨레랑스란 기껏 그 말의 다른 뜻인 '사창가'를 의미할 뿐이었다.
우리가 프랑스문화라고 하는 것은 대체로 '파리 문화'를 말하는데, 그것은 프랑스 시골 농민의 문화보다도 런던이나 뉴욕과 같은 대도시 문화에 더 가깝다. 또한 같은 파리에서도 그 대다수인 노동자의 문화가 아닌 소수의 지식인 문화를 우리는 프랑스 문화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는 지금까지 기본적으로 카톨릭 국가다. .. 18세기에 와서 카톨릭 대신 '문명'이라는 이념을 계몽주의가 제공했다. ... 프랑스 혁명은 이런 문명의 본질인 자유의 혁명으로 나타났다. ... 혁명 후 다시 중앙집권적 보편주의를 주장하는 자코뱅 측과 지방분권적 개별주의를 주장하는 지롱드 측으로 나누어졌 ... 18세기부터 본격적인 제국주의 국가로서 식민지 정복.. 문명국 프랑스가 야만국 식민지를 정복한다는 문명의 사명이라는 이데올로기 .. 인종차별주의를 형성. .. 그런 인종차별주의는 프랑스를 자유와 인권 및 민주주의 나라라고 하는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 ..
르낭에 의해 상징되는 프랑스 국민주의=민족주의=국가주의가 ... 사르트르에 의해 결정적인 도전을 받게된다는 점
우리의 휴머니즘은 허위의 이데올로기였으며, 약탈의 교묘한 정당화였다. 그 달콤한 부드러움과 극도의 세련미가 우리의 침략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비폭력이라는 그럴 듯한 외관을 갖고 있다.
유럽인들은 노예와 괴물을 만들어냄으로써만 스스로 인간이 될 수 있다. 토착민성이라는 신화가 존재하는 한, 이 위선의 가면은 벗겨지지 않는다.
(1968년) 5월 혁명은 파리의 서쪽 교외인 낭테르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은 북아프리카에서 이민 온 노동자들의 판자촌이었다. 1965년 그곳에 대학이 만들어졌으나, 그곳 학생들은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사회에서 유배되었다는 의식을 지녔다.

<보부아르>
: 나(박홍규교수가 아닌 나!)는 그들의 사생활에 대해 큰 관심이 없다. 계약결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선택이었고 그것을 존중한다. 미화 또는 찬양도 비판도 필요성을 못 느낀다.  

<평화주의와 정치적 실용주의>
독일과 프랑스의 전쟁은 두 개의 민족주의-자본주의 전쟁인 것이지 그 어느 하나의 이념이 정통성을 갖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사회주의 체제인 소련도 모스크바재판이나 숙청에서 보듯이 권위주의적 독재체제에 불과했다. 특히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 국제주의의 포기와 민족주이 채택 ... 사르트르는 바타유 등과 함께 그 어느 정치적 세력에도 가담할 수 없이 중립적 입장.
그러나 1930년대 말 나치스의 위협 앞에서 사르트르는 절대적 평화주의를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순수한 아나키즘 원리로부터 상황윤리와 정치적 실용주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음.
민주주의는 본래 모든 의견을 관대하게 대하기 때문에 언제나 파시스트의 온상이었다. ... 결국은 제한적인 법률을 만드는 것이 좋은 것이다. 즉, 자유를 반대하는 자유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존재와 무>
서론에서 현상학에 근거한 자신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먼저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원론이 아니라 즉자와 대자라는 말을 사용한다. 대자란 인간의 의식을, 즉자는 그 의식의 대상인 '존재'를 말한다.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이를 '무'라고 부른다. <존재와 무>란 그런 두 가지를 뜻한다. '사물과 의식', '즉자와 대자'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 사르트르에 의하면 사물, 즉 즉자존재의 우연성과 부조리성이 대자존재의 의식에 대해 구역질을 느끼게 한다. ... 즉자는 의식이 제거된 존재이자 자유가 아닌 모든 것으로 상황의 성격을 조건짓는 것이고, 이 상황에 대항해 의지적인 대자는 정지와 운동, 사물과 의지 사이의 끝없는 투쟁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주장한다.
인간은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사회 속에 있고, 싫든 좋든 타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즉, 인간의 즉자적 존재이나 동시에 대타적 존재라는 것이다. .. 자타의 관계는 서로 사이가 좋은 연대관계가 아니라 적대관계이다. 따라서 타자는 지옥이다.라는 말이 희곡 <닫힌 방>에 나온다.
인간은 사물과 달리, 투기(投企,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에로 자기를 내던지는 실존의 존재 방식. 하이데거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의 개념)에 의해 스스로를 선택하고, 스스로의 본질을 만들어 간다. ... 그러나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대자에 즉자를 강요당해 세계-내-존재의 자유실현 행위는 좌절된다. 그럼에도 인간은 좌절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 사르트르의 결론이다.
사르트르는 개별적 인간의 환원 불가능한 개별성을 주장함에 의해 역사에 대립하는 실존주의를 주장했다. 언제나 변하지 않는 하나의 인류라고 하는 환상에 근거하는 그 역사가 인류의 불행을 구원하지 못하는 이상, 그것이 어떤 방향을 갖는다고 해도 의미는 갖지 못한다고 보았다. ... 그러나 1943년 출간된 그 책을 누가 사서 읽겠는가? 마침 책의 무게가 정확하게 1kg이어서 어려웠던 점령시절에 그것으로 과일과 야채의 정확한 무게를 잴 수 있다는 야유도 생겨났다.

<알제리문제>
1956년 헝가리 침공 ... 사르트르 소련 비판 ... 프랑스공산당과 동반기 5년 끝냄. 사르트르의 완전한 고립.
알제리 문제를 위해 홀로 싸웠다. ... 1960년 사르트르를 감금요청에 대해 드골 '볼테르를 감금시키는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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