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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여러가지

모리스 블랑쇼_침묵에 다가가기

문학(나의 경우는 시) 언어는 일상 언어와 어떻게 다른가? 답을 찾기 위해 책을 읽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때마다 해당 분야 전문지식, 개념과 논리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논리와 개념들을 알아도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말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 했다. 말로는 내가 느끼는 것을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을 언젠가 깨달았다. 그리고 시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시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시도라고 생각했다. 거기까지였다. 

이 책에서 문학 언어, 예술로서의 언어(편의상 이제부터 시어로 축소시키겠다)에 대한 사고와 통찰을 만날 수 있다. 어떻게 시어가 일상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는지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시어가 왜 부정확하고 흐릿하고 다양하게 해석되는 지, 그리고 그것이 왜 시의 힘이 되는 것인지.   

정의하고 구분하고 분석하는 말과 통합하고 추상하는 말과, 그리고 말과 말 사이를 미끄러지듯이 헤엄치는 말이 있다. 
나는 모양도 방향도 없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 마지막 말, 헤엄치는 말이 좋다. 

1960년대, 블랑쇼는 개인을 동전 한 닢으로 만들어 버린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세계에 저항의 지점이 있다며 그것을 '정치, 욕망, 시, 사유'에서 찾았다. 2021년, 정치와 욕망 뿐만 아니라 시와 사유 조차도 '비트코인'의 세계에 흡수되어 버렸다. 세계는 언제나처럼 문제적이고, 존재를 억누른다. 저항과 참여가 존재의 이유라면, 저항의 지점은 어디에 있나? 어디에나 있나? 

나의 저항은 바깥, 변두리, 언저리, 경계, 가장자리에서 아웃사이더가 중심이 되어 시작된다. 언어의 합일은 위험하다. 다양성이 문학의 존재이유다. 유행을 쫓아 동전 한 닢을 구걸하지 말라. 문학은 혁명이고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서문>
-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거는 것이 문학이자 글쓰기
- 그가 말하는 '문학의 공간'은 침묵, 한계, 불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다. 극단에 이르기까지 언어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일은 언제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침묵을 마주하게 한다. 
- 문학 텍스트가 진실을 전달한다고 보는 통념에 따른다면, 문학비평은 진실을 붙잡기 위한 것이 되어야 맞다. 그러나 문학의 중요성은 오히려 진실을 의심하는 데 있으며, 나아가 문학은 진실을 의심하라고 '요구'한다.
- 객관화된 지식이 삶의 핵심부를 먹어 치우는 이 시대는, 인간 공동체는 물론이고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게 한다. 하지만 문학도 죽음도 타자도 결코 객체가 될 수는 없다. ... 우리 삶이 쪼그라들지 않도록 해 줄 문학 공동체를 제시하고 발전시킨다. 문학적 본질을 가진 우리 공동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195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기까지 블랑쇼는 유대교와 공산주의, 문학 사이의 결합을 추구하며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었다. 

<1장> 문학이란 무엇인가
- 블랑쇼는 문학이 끊임없이 어떤 정의에서도 '벗어난다'는 생각에 힘입어 약간은 역설적으로, 본질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문학의 본질이라고 썼다. "그러나 그 어떤 본질적 특성도, 그 본질을 굳히거나 깨닫게 해 주는 확언도 피해 나가는 것이 문학적 본질이다. 다시 말해, 문학적 본질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재발견되고 다시 만들어진다. '문학'이나 '예술'이라는 말들이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하고, 중요한 어떤 것과 상응하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 
- 텍스트를 이해하려고 애를 써도 항상 실패하는 까닭. 블랑쇼는 텍스트가 두 가지 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는 우리 문화의 일부분인 텍스트 ... 문학 이론의 대상이며 비평가들은 여기에 근거해 해석하고 판단한다. 그러나 또 다른 면, ... 텍스트가 자기만의 목소리로만 말하면서 텍스트를 개념화하려는 우리의 시도에 저항하는 것이 텍스트를 유일무이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텍스트는 매번 우리 이해 능력의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언어를 고안해 낸다. 
- 텍스트는 표현 형식의 개성 때문에 이해에 저항한다. 그리고 블랑쇼에 따르면, 바로 이 개성이 문학은 일반적으로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지 못하게 한다. 

세 가지 유형이 문학이론 : 작가, 독자, 텍스트  
1) 작가 - 텍스트가 외적인 형식을 통해 작가의 내면을 번역한 것이라면 여러 인물들과 상황들은 작가 마음 속의 여러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니, 이 작품은 작가의 무의식을 옮겨 놓은 것이라고 여기지리라. 
2) 독자 - 자기 작품을 논할 때 작가는 더이상 그 작품의 작가가 아니라 첫 번째 독자일 따름이다. ... 저자의 원래 의도에서 텍스트의 모든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수용이론)
- 문학 텍스트의 의미는 작가의 마음 속이나 텍스트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상호작용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텍스트는 그 텍스트를 읽는 이들의 수만큼이나 풍부한 의미와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고 말할 수 있다.
3) 텍스트 - (러시아 형식주의) 작가, 작품, 문화를 가로질러 반복되는 구조와 배열들을 발견 ... 이 구조나 모형들은 작가의 의도나 독자에게 치우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때문에 객관적으로 분석될 수 있으며, 모든 창작과 독서 행위를 빚어내고 결정하면서 작가나 독자 모두의 바깥에 존재한다. 

- (구조주의와 반대로) 블랑쇼는 문학의 자율성을 언급하면서 작품의 완전한 개별성을 이야기한다. 문학비평은 텍스트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또 그 본질을 통해 문학의 일반 이론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하나하나에 고유한 윤곽과 흔적을 따라가는 것을 의무로 삼는다고 본 것이다. 
- 형식주의자나 구조주의자의 입장에서 언어는 설명의 수단이다. 반면에 블랑쇼에게 문학 언어는 모든 해석의 장애가 된다. "문학은 분명히 비평의 대상으로 남는다. 하지만 비평은 문학을 명백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 우리가 눈앞에 출현한 텍스트가 텍스트와 세계 사이에 열어 놓은 어떤 공간은 우리가 "베케트의 소설은 현대 생활의 공허함과 부조리에 대한 거야"라는 식으로 말할 때 닫혀 버린다. 언어를 일상적인 용법에서 분리시켜서 낯설게 하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라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 문학언어는 의사소통에 필요한 언어와 다르다. 시든 소설이든 모든 개별 문학 텍스트는 자기만의 자율성을 가지기 때문에 일반론을 펼치면 그 표현의 독특성을 포착해 내지 못한다. 확실히 블랑쇼는 문학의 기준을, '문학의 공간'에서 예술 작품들의 '고독'이라고 부른 개별성과 고립성에 두었다. 

- 모든 독서 경험은 그때마다 특유한 것이며, 텍스트는 특정한 해석으로 단언될 수 없다. 따라서 독서와 텍스트는 문학을 일반적으로 정의하려는 그 어떤 시도나 문학 이론들도 피해 간다. ... 텍스트의 저항을 이해하는 열쇠는 언어이다. 문학에서의 언어는 일상 언어의 쓰임새를 낯설게 하며, 문학 일반론을 펼치는 것으로는 텍스트가 표현하는 독특함을 잡아 낼 수가 없다. 

<2장> 언어와 문학
- 문학 이론이 아니라 철학에서 유래한 부정성 개념은 낱말의 비현실성을 통해 사물의 현실성을 부정하는 언어의 힘을 잘 설명해 준다. ... 러시아 출신 철학자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해석한 헤겔철학이 블랑쇼가 부정성을 이야기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인 말레르메의 언어와 시에 대한 언급들을 통해서 받아들였다. 
- 블랑쇼는 일찍부터 문학 언어를 말들의 물질성(말의 소리, 형상, 리듬)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가 문학 언어의 핵심에 자리한 무無를 명상하도록 나아가는 길을 열어 준 것은 헤겔의 부정성 개념이었다. 

언어정보모델
- 말라르메는 언어가 생각을 교환하는 매개라고 보는 상식적인 '언어정보모델'을 비판했고 블랑쇼도 여기에 동의한다. 언어정보모델에서는 ... 단어들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 음성으로 나온 것이다. 이 음성을 들은 이가 ... 다시 그 소리를 마음속의 생각으로 바꾸어 놓는다. ... 말한 이와 들은 이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은 똑같을 것이다. 
- 언어정보모델에서 언어는 물질적 매개, 정신적 개념, 지시되는 사물이라는 세 요소로 구성된다. ... 간단히 말해 언어정보모델의 세 가지 기본요소를 낱말, 개념, 사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

말의 물질성: 정보 대 매개
- 문학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말의 의미만이 아니라 정보라는 항목으로 축소될 수 없는 그 짜임새texture, 즉 리듬과 색채, 스탕일 때문이다. 
- 블랑쇼가 점차 그저 '글쓰기'라고만 부르게 된 문학에서 언어는 정보가 아니라 매개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매개는 정보에 저항하고, 끼어들고, 정보를 지연시킨다. 문학은 작가의 의도나 문화적 의미 같은 외부적인 것을 실어 나르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 개념의 부재를 관념의 현존이 채워 놓는 이 부정성(헤겔의)은 충분히 부정적이지 않다. 만약 언어가 부정이라면 ... 사물의 실재와 관념의 현존을 모두 부정하는 문학이다. 말하자면 문학은 이중부재이다. 

부정과 언어의 부재
- 언어는 소통하는 순간에 사물의 실재를 부정하면서 그 사물에 대한 관념을 소통하게 해 준다. .. "나는 '그녀'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서 살과 피로 이루어진 현실을 얼마간 빼앗아 와야 한다. 그녀가 부재하니까, 그녀를 소멸시키니까" 언어는 실제 여성의 개성을 지워서 그녀라는 의미를 소통시킨다. ... 나무라는 관념을 위해 모든 특정한 실제 나무들은 부정된다. 언어의 본질적 특성은 추상 능력에 있다. 다시 말해 사물의 실재와 거리를 두는 것이다. ... 블랑쇼는 언어를 놓고 "말은 재현만이 아니라 파괴하는 역할도 한다. 말은 사라지게 만들고, 대상을 부재하게하며 소멸시킨다"라고 썼다. ... 사물들을 말할 때 우리는 사물의 직접성을 지워 버린다. 
- 언어의 부재는 그 낱말이 표현하는 관념이나 개념에 의해 감춰진다. 이렇게 되면 낱말들은 자기가 부정했던 사물에게로 되돌아간다. 사물이 사라진 자리는 관념이 대신하며, 관념은 원래 부정되었던 사물만큼이나 안정성과 지속성을 갖는다. 사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사물은 언제나 변화하고 대체될 수 있으므로 관념은 사물보다 훨씬 영구적이다. 따라서 개념은 사물의 대체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 말이 사물을 부정하고 나면 개념은 사물을 대체한다.  개념은 사물의 대체물 혹은 재현으로서, 사물의 직접성을 부정하려는 언어의 힘이 뒤에 남겨둔 부재를 채운다. 언어에 속하는 것은 실제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의 개념 혹은 관념이다. 개념의 현존이 사물의 부재를 대체하는 한, 언어의 파괴적인 힘은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문학의 이중부재
- 그러나 문학작품에 들어 있는 낱말은 언어의 부정성을 개념의 긍정성으로 바꿔 놓지 않으며, 고집스럽게 언어의 부정성을 유지하고 지킨다. ... 언어를 부정성으로 이해하면 정보 교환보다 문학이 언어의 본질에 더 가까운 이유를 알 수 있다. 정보 교환은 부재를 숨기지만, 문학은 우리가 부재를 부재로서 체험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학에 쓰인 낱말들에서는 사물의 실재뿐만 아니라 낱말이 지시하는 개념 역시 부정된다. 일상어법에서 '고양이'는 고양이라는 관념을 의미할 뿐이지만, 문학에서는 말한 그대로를 의미하지 않는다. 

- 문학에서 어떤 낱말이 지시하는 것이 더 이상 특정한 사물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지시한다는 것인가? 블랑쇼는 '다른 낱말들'이라고 답한다. ... 낱말은 글쓰기의 요구에 따라, 작가의 표현 형식을 따라, 그 물질성과 비실재성을 동시에 부여 주면서 끊임없이 다시 만들어진다. 문학이 이해에 저항하는 근원은 여기에 있다. 한 낱말이 텍스트 바깥의 어떤관념이 아니라 또 다른 낱말들에 연결된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어떤 정보들이 아니라 단일한 해석으로 정리할 수가 없을 정도로 무한히 바뀌는 의미다. 블랑쇼는 의미의 변화를 가르켜, 낱말이 개념이라는 파괴적인 힘에 얽매이지 않게 될 때 가지게 되는 힘이라고 설명한다. 

- 그가 글쓰기의 요구나 작품의 무위라고 부른 이 '끝도 한도 없는 속삭임'은 특정한 개념이나 의미에 종속시키려는 그 어떤 시도에도 저항한다. ... 오히려 이해에 대한 텍스트의 저항은 원래부터 독서 경험에 속한다. 문학에서 사물과 개념이 이중으로 부재한다는 블랑쇼의 논의는 그가 분명한 반리얼리즘적 입장을 고수했음을 뜻한다. 그는 ... "시는 물질적 대상들의 호소에 반응하지 않는다. 이름을 지어 주어 이들을 보존하는 것이 시의 기능은 아니다" ... 리얼리즘은 문학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재현으로 본다. ... 그러나 언어가 자기만의 세계를 위해 실제 세계를 부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문학이 언어의 힘을 최대한 발휘한다면, 어떤 소설이나 시도 그저 세계의 묘사, 모방, 반영일 수는 없다. 개념 너머로 나아가는 낱말들의 매혹적인 힘은 그 이중성과 은폐성에서 온다. 

- 블랑쇼는 문학에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한쪽으로는 현실적 내용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내용이 사회적 세계에 속한 것처럼 해석할 수 있다. 다른 쪽으로는 문학 언어 자체의 순수성이 있다. 이 순수성은 일상 언어에 갇히지 않으려고 제 자신에게 되돌아 간다. 
"문학은 두 가지 면으로 나뉘다. ... 한쪽은 의미로 가득 찬 산문이다. 산문은 언어로 사물들을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산문의 언어는 사물들을 그 의미에 따라 지시한다. ... 예술이 일상의 말들은 불충분하다고 느끼고 폐기해버리는 순간이 온다. 왜 예술은 일상 언어를 못마땅해 하는가? 예술은 의미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은, 어떤 사물이 부재를 거쳐서 어떤 단어와 연결되었는데도 그 사물이 그 단어 속에 온전히 존재하리라고 믿는 것이 바보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술은 이 부재 자체를 다시 잡아내고 이해를 향한 끝없는 운동을 재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 모험을 떠난다"

- 블랑쇼는 문학에서의 언어가 세계를 재현하는 언어의 기능에서 놓여나서, 다른 말들과 내적 연결을 통해 자기의 세계를 창조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문학 언어가 이룩한 세계의 핵심에는 근본적으로 일시성이 있다. 안정적인 의미를 선사하는 외부의 현실이 없기 때문이다. 

<7장> 윤리와 철학
- 우리는 타인들을 일상에서 친숙해진 물건들처럼 다룬다. 살아가면서 그때그때 세우는 계획 속에 타인들을 포함시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 '세계'라는 말이 내가 내 상황과 환경에 대해 알고 있는 바의 전체로 이해된다고 보는 한, 이 모든 행동들 속에서 다른 인간 존재들은 내 세계의 일부분이다. 여기에서 타자는 사물들과 비슷하게 취급될 뿐이다. 

- 권력을 정치적인 용어로 이론화하면 자기의 목소리는 들리게 하고 타자의 목소리는 침묵시키는 말하기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 자유주의에서는 독립적이고 본래 사적인 개인이 실존하다고 가정해 ... 이런 개인들은 서로 교환 관계를 맺으며 언어를 소통의 수단으로만 삼는다고 간주된다. 자유민주주의 이론들에 따르면, 모든 정치적 문제들은 우리의 오성understanding의 범주 안에서 일어나니 빈틈없는 해결책을 마련해 해법을 찾아낼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오성이 범주와 개념을 통해 경험적 대상을 인식하고 현상을 판별하는 능력이라면 이성은 경험적 차원을 넘어서 추리하고 판단하는 이념의 능력)

- 유용성만 중시하는 세계, 사람들을 엇비슷한 소모품으로 만드는 이 세계 .... 전체화된 공동체에서는 집단 전체에 유익한 관계, 다시 말해 유용성만을 중시하는 현실적이고 내재적인 관계가 중심. 
- 사법제도나 정치제도를 통해 만난 타인들은 내 욕망이나 계획의 대상이 될 뿐이며, 여기에 나와 다른 존재인 타자의 자리는 없다. 
- 우리는 먼저 타자를 대상화하지만 그 후에는 서로 서로에게 대상이 된다. ... 타자를 어떤 물건이나 대상이라고 여기는 세계 속에 놓인 공동체가 바로 내재적인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자기 능력을 고려하여 노동과 감정의 시장에 자기 자신을 내놓으며 다른 사람들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일상의 교환 관계에 필요한 경제적 단위로 이해한다. 이렇게 인간을 경제 단위로 축소한다. ... 이런 식의 공동체 관념에서 의미 있는 인간적의 소통 영역인 정치가 경제에 밀려 사라지는 현실을 보게 된다. 

- 전지구적공동체 ... 용어가 의미하는 바는 ... 이 세계에 이방인들이 없으며 그저 나와 같은 개인들만 있다는 것이다. ...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정치가 부재하는 운동이다. ... 자유로이 교환 가능한 단위들이 시장을 이뤄야 ... 이 단위들은 본직적으로 동일하거나 적어도 동일한 것으로 환원될 수 있어야만 한다. ... 이때 개인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개인을 동전 한 닢에 비유하는 것이다. 
- 원격통신 매체와 '정보 고속도로'가 의사소통을 강화하고 지구화하는 우리 시대는 인간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도 없을 정도로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 시대라고 블랑쇼는 진단한다. 공동체 의식을 잃어버린 우리는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 블랑쇼는 사르트르를 ... 카뮈처럼 비평가들을 기쁘게 해 주지 않은, 복잡하고 독특한 작가라고 본다. ... 사르트르에게 주어진 노벨상은 그의 작품이 해롭거나 거슬리는 것이 아님을 보증해 준다. "그러나 문학을 별 문제 없게 만드는 것은 또한 문학의 파멸을 초래하리라" 사르트르가 작가로 남길 원하는 한, 그는 특정한 문화, 특정한 사회, 특정한 자유의 이데올로기에 구속되게 만드는 노벨상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학은 일단 정전 속에 포함되고 나면 소통을 그만둔다. 시체를 해부하듯이 그 구조와 작법을 공부해야 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 텔레비전은 사람들이 제 집의 울타리 바깥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면서 사회의 탈정치화를 이끈다. 모든 체제는 항상 길거리를 두려워했다. 집 밖으로 나와 토론하고 논쟁하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미처 깨닫기도 전에 정치적 행동 직전의 어떤 순간에 서 있는 위태로운 군중을 형성한다. "길에 나와 있는 자는 항상 정치의 일부가 되기 직전이다" ... 세계를 우리 거실에 가져와 보여 주는 텔레비전이 거리와 카페의 공동체에서 벌어진 정치적 사건에 참여하는 것을 쓸데없는 일로 만들어.  

- 오성은 세계를 계산하나, 이성은 판단하는 힘이다. 하지만 오성은 과학 기술이 뒷받침해 주고, 과학 기술은 이성이 지배하지 못하는 권력을 쥐고 있다는 점에 근대성의 문제가 있다. (원자폭탄의 예) 모든 것과 관련되므로 가장 우월한 지적인 힘이라 할 수 있는 이성은 우리가 고삐를 놓아 버린 힘들에 밀려났다. 
- 오성은 정확히 폭탄처럼, 함께 뭉쳤던 것을 분해하는 기능을 한다. 어떤 문제를 분석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다루기에 적당하게끔 그 문제를 각 부분들로 나누려고 오성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문제든 분해하고 각각의 부분을 따로 다루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확신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인다는 오성은 사실 파괴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인다. 
- 오성은 인간 그 자체를 분해한다. ... 오성이 성공을 자축하는 동안 이성은 잠들어 있다. ... 과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오성이 유용하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 정치, 윤리 혹은 도적적 문제들에 적용시킨다면 위험하다. 인간 공동체를 관련된 모든 개인들의 총합일 뿐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분석을 통해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비는 것은 자기가 한 일이 무엇인지 깨닫지도 못하면서 정치 영역을 파괴하는 일이다. 

- 결국 유일한 희망은 아래와 같은 말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아직 저항의 지점이 남아 있다. 정치, 그리고 욕망, 시, 사유의 놀이, 이 지점들은 점점 약해졌지만 퇴락하지는 않았다" 문학이 그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본성을 되살려 내야만 한다면, 우리는 문학은 본질적으로 논쟁의 힘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 기성 권력에 대한 논쟁, 무엇이 존재하느냐에 대한, 그리고 존재의 사실에 대한 논쟁, 언어에 대한 논쟁, 그리고 문학 언어의 형식들에 대한 논쟁, 마지막으로 권력 그 자체에 대한 논쟁 
- 이 논쟁 속에서 예술은 기성 가치의 세계에 저항한다. ... 예술을 진정한 정치의 영역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은 현실의 조작이 아니라 세계의 전복이다. 
- 이 세계는 목적, 잘 짜여진 균형, 진지함과 질서에 대한 복종이 지배하고 있다.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과학, 기술, 국가이며, 의미, 안정된 가치, 선과 진의 이상이 세계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예술은 '이 세계를 완전히 뒤집는다' 이 세계에서 예술은 불복종, 불균형, 불성실, 무지, 악, 무의미다. 

- 언어의 본질인 관계는 단순한 정보교환이 아니라 그 관계 자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과의 관계는 내가 상대와 직접 관계하는 한 모든 실제 사회관계를 앞서는 관계. 

<8장> 문학적 공동체
- "사람만이 내게 완전한 타향이다"(타인은 지옥이다-사르트르)라는 말에서 '내게 완전한 타향'이란 객관적 앎의 영역 바깥에 있다는 의미다. 이 절대적 소외를 돌파하려면 지식 말고 다른 매개가 필요하다. 그 매개는 예술이다. 
- 블랑쇼는 살아남는 데 성공한 우리 조상들과 네안데르탈인을 비교한다. 멸종되어 버린 네안데르탈인은 예술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인간이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라면 본질상 예술적ㅇ라고도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인간 존재의 근원은 예술에 있으며 따라서 인간 공동체의 본질을 예술 속에서 찾아야만 한다. 
- 작가는 독자에게서 자기의 글을 망쳐 놓는 힘을, 혹은 블랑쇼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의 익명성을 본다. 따라서 독서는 그 책의 저자가 사라지게, 권의 있는 저자가 여느 필자들 중 하나가 되게 한다. 저자의 죽음은 문학의 정치적인 면과 근본적으로 맞닿아 있따. 

- 말은 저자라는 특정 존재에게서 놓여나면 소통을 시작한다. 저자의 목소리가 무력해지는 곳에서 태어나는 것이 언어이다. ... 익명의 글쓰기가 문학작품을 만들어 내듯이 나는 나 자신의 핵심부에서 익명의 글쓰기를 발견한다. 
- 사르트르는 ... 프랑스 정치-예술 어디에서건 중요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모습을 드러낸 행동주의자였으나, 블랑쇼는 그 자신의 글에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밤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 두 사람 모두 인간 공동체는 당연히 타자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가정 하에 인간 공동체의 가능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사르트르가 그의 유명한 철학 저작인 <존재와 무>에서 말한 것처럼, 타자는 대상으로 고려되거나 앎의 세계에서 행동하는 주체로 여겨지지 않으면서 내 앞에 나타나야만 한다.(타자가 대상이 되거나 타자가 나와 똑같은 주체가 되지 않는) 내가 타자를 대상으로 간주한다면 타자는 자기 힘으로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를 주체적인 행위자로 표현하는 순간, 나는 그 사람에게서 나 자신을 유추해 내고, 그와 나 둘을 모두 주체성의 보편적인 형태가 보여 주는 한 예로 이해한다. 그래서 사르트르와 블랑쇼느는 타자를 대상화하는 세계에서 타자가 있을 수 없으며, 내 세계를 파괴하며 들어오는 존재가 타자라고 생각한다. ... 두 사람은 타자를 '진정한 초월'이라고 생각했다. 즉, 나 자신의 세계 너머, 더이상 지식의 층위가 아닌 곳에서 내게 말을 거는 존재가 타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대상을 알기 때문에 지배할 수 있다. 하지만 타자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타자와의 관계에서 본질적으로 나는 수동적이다. 

- 사르트르는 내 세계를 뚫고 들어와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타자의 시선이 내 세계의 의미를 내게서 빼앗아서, 내 세계의 지평 안에 갑작스런 공백을 만든다고 했다. .. 타자의 얼굴은 앎의 세계 너머에 있으므로 타자를 주체나 대상으로 설명하면 포착되지 않는다. 
- 우리가 취해야 할 윤리적 자세, 나와 타자가 맺는 직접적 관계는 타자를 이방인, 정말로 다른 자로 만든다. 타자와의 관계는 모든 경험에 선행하니 타자를 부정하는 일은 사악한 신념을 따라 그들을 없애 버려야만 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동성애 혐오는 그저 무지의 소산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이 차별적 태도들은 인종주의자 편에서 결심하고 행동하라고 요구한다. 헤겔의 변증법적 해결책이 갖는 근본적인 결함이 여기에 있다. (인종주의자와 소수인종의 변증법적 결합은 불가능!!!)

- 보편적 평등으로 몰아가는 사회의 담론을 주장하는 것은 합일communion(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의미하는 포도주와 빵을 먹는 성찬의식을 통해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은총을 얻게 된다는 기독교 교리는 합일에 이른 공동체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낸다)에 바탕한 공동체 형태가 지니고 있는 전체주의의 일종일 뿐만 아니라 거짓말이다. (전체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열광에 휩싸여 집단 자살에 이르기도 ... 종교나 현실 공산주의를 위시한 이데올로기는 합을 강요하면 공동체를 위협한다)

- 우리 사회에는 어떤 형태의 평등도 없다. ... 모든 말하기는 폭력이다. 대화를 주장하면서 이를 짐짓 무시하는 것은 전쟁이 또 다른 형태의 대화라고 보는 변증법적 낙관론에 자유주의적 위선을 더하는 것이다. 
- 블랑쇼는 한데 뭉쳐야만 공동체가 성립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에 작별을 고한다. ... 정치에서 문학이 수행해야 할 과제는 블랑쇼의 표현을 빌면 복수적 말하기plural speech에 달려 있다. 하나의 의미로 축소되지 않는 이 말하기는 의미를 투명하게 전달하는 것도, 진리를 담지하는 주체의 위치에 관한 것도 아니다. 
- 주체라는 추상적 보편 관념으로 축소되지 않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공동체가 추구한다면 또 다른 언어 경험이 필요하다. 우리를 모두 동일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이방인의 진실에 다가가는 비변증법적 글쓰기가 그것이다. 이 언어는 정치적 참여의 언어가 아니라, 문학적 참여의 언어이다. 즉, 언제나 세상 속 인간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려고 하는 것이지 오락거리가 아니다. 

- 바깥으로 탈출하는 죄 지은 자의 존재(유대인의 이산)는 체제에 지속적인 위협이다. 유대교는 바깥으로 향함이 본질인 윤리적 요구이다. 이 '바깥'은 지리적 용어가 아니라 글쓰기와 역사의 운동에 자극받아 계속 새로워지는 전통의 개방성을 가르킨다. ... 그 어떤 정체성을 부여받았더라도 기존의 틀 그 바깥으로 향하라는 요구...  진리는 유목적. 
- 유목적 공동체는 그 땅의 전통과 완전한 하나가 되지 못한다. 즉, 이 공동체는 홀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켜야만 하고, 그 사회의 지배적 정체성이 형성되지 못하도록 계속 방해해야만 한다. 

- 세계의 바깥이란 완전히 세계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세계의 한계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실존의 의미를 소모해 버리지 않고 세계 안에 살아 있는 존재라는 우리 자신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게끔 문학은 우리를 인도하면서 참여한다. 
- 사르트르는 문학이 행동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으로 묘사하며 따라서 문학은 그 자체가 행동으로 나타난다. ... 문학은 무엇보다도 인간 실존의 자유를 위해 참여하는 소통이라고 보았다. 
- 문학작품의 참여가 작가와는 독립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작가는 작가로서의, 나아가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과 마주한다. ... 지식인은 일정한 역할이 있다. 사람들이 가끔씩 일상 업무에서 눈을 떼도록 만드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비판하거나 판단할 수 있도록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다.
- 문학작품의 저자들은 애매한 위치에 서 있다. 정치적 입장을 꼭 드러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닌데도 이들은 저자라는 자격으로 체제에 저항하곤 하니, 공산당이 사르트르의 지지와 참여를 계속 미심쩍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 (블랑쇼) 나는 어떤 당에 속해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왜 자기들과 의견을 같이 하는 작가들을 불신하는지 이해가 간다. 이 작가들은 문학에도 참여하고 있고 결국 문학은 재현한 것의 내용을 문학 행위를 통해 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학의 법칙이자 진실이다. 
- 사르트르는 인간은 어떤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 상황 속에서부터 자기 존재를 만들어 간다고 보았다. 여전히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자기의 운명을 만들어 가는 존재인 호모 파베르(도구적 인간, 노동하는 인간)였으며, 인간은 자유 의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타자의 절대성과 세계라는 두 한계를 모두 인식하여 자기의 실존을 만들어 나가야만 했다. 

- 마르크스주의에서 모택동주의로 옮겨간 사르트르에 대해 블랑쇼는 항상 직접적으로 행동으로 정치에 관여하려고 한 사르트르의 태도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 블랑쇼는 더 간접적인 참여와 문학작품의 비참여를 통해 정치에 개입하려고 했다. 
- 사르트르가 '공산주의는 우리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정치적 지평'이라고 했듯이 블랑쇼도 '나는 끊임없이 해 왔던 반성, 공산주의의 절박성을 다시 성찰해 보려고 한다'고 했다. ... 블랑쇼는 공산주의를 다른 이데올로기와 대결하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보지 않는다. .... 공산주의는 정치성을 부정하는 사적 개인이라는 자유주의적 관념에 대항하는 것이다. ... 진정한 자유, 인간 공동체의 성취, 통일성의 원칙으로서 이성. 달리 말하자면, 완전한 의미에서 공산주의라고 일컬어져야만 하는 총체성. .. 공산주의 문제 제기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묻는 필수불가결한 질문이다. 

- 공산주의는 기존 공동체에서 내쫓긴 정치성을 사유하며, ... 공동체 없는 이들의 공동체이다. 
- 문학은 공동체의 영역에 있으면서도 합일을 가져오지 않는다. ... 문학은 근본적으로 민족주의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으며 어떤 순간에도 혁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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