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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사진

떠도는 시간의 기억_김영수의 초기 사진들 1977-1984

나는 반짝하고 시대를 스쳐 가는
순간적인 것보다는
끈끈하고 깊이 스며드는
본질적이고 영구한 사진을 찍겠습니다. 

이 책을 
사진을 공부하는 젊은이들에게
드립니다. 
- 김영수


첫 페이지의 충격
내면의 깊이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엄청난 타격감. 일단 주먹으로 내 얼굴, 내 눈을 한 대 정통으로 때린다. 소년은 나를 본다. 나를 보며 말한다.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고 있는가?
 
인물 사진들이 잔더의 사진보다 훨씬 깊다. 잔더처럼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의 초상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내면의 풍경을, 희노애락을 느낄 것만 같다. 자부심과 웃음과 비참과 쓸쓸함, 그리고 희망과 절망. 

사물에서 느껴지는 흔적들 시간에 닳고 닳은, 무너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터지고 죽고 찌그러진 것들. 특히 나는 앉는 부분이 모두 뜯겨나간 의자 사진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

풍경사진들은 다닥다닥 붙은 집들, 가난한 동네의 허물어져 가는 건물들. 쓰레기들, 낮은 처마, 쓸쓸한 빈터 들이다. 

모두들 눈에 보기에 아름다운 것들에 관심을 둘 때, 김영수 작가는 겉보기에 추한 것들, 역겨운 것들, 사소한 것들에서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생각과 느낌의 파동을 끌어낸다.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복잡하고 슬프고 비참하고 우울한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찍었다. 인간의 모습에 비친 내면과 사물과 풍경에 담겨 있는 인간의 흔적과 내면을 찍었다.  

해설 요약 

사진집을 열면 심광현 한예종 교수의 해설/평론 글이 먼저 나온다. 인상적인 대목을 보면,

사진 이미지는 .. 특수한 해석의 틀과 시점의 틀에 의해 재현된 현실. ... 오늘날 대부분의 사진들은 현실을 풍성하게 드러내기보다는 현실의 많은 측면을 생략하거나 왜곡한다. 

김영수의 사진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이 다른 사진들에 의해 생략되거나 왜곡되는 현실의 어떤 '측면'들이다. ... 소재의 측면이 아니라 '관계'들이다. 80년대 후반 그의 작품은 '고문', '주민등록증', '증명사진' 등과 같은 '사람' 연작사진들은 ... 명시적으로 직접 드러내 보일 수는 없지만, 그러나 분명하게 감지되고 호흡으로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문화정치적'인 틀에 해당된다. 
1993년 개인전 사람은 80년대 작품들처럼 비판적인 문제제기의 성격을 띤 것이 아나리 일종의 '존중'이나 '찬사'의 성격이 강하다. 
급변하는 문화정치적인 지형 변화이 와중에 김영수의 사진들은 표면의 반짝거림에 빠져드는 시각적 관성을 거슬러서 빛과 공간, 어둠과 밝음의 관계 자체를 다시 생각해 보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기에 걸친 그의 초기 작품들은 ... 소재와 주제가 다양한 범위에 걸쳐 있으며, 사진의 형식들도 다양하다. 인물, 정물, 풍경, 실내, 초상 사진 등의 다양한 장르적 편성과 클로즈업으로 구성된 강한 집중도와 밀도로부터 롱 숏에 이르는 다양한 형식들은 후기 작품들에 비해 더욱 심미적인 효과를드러내 보여주는 것 같다. 

흥미로운 점은 ... 대상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만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두터운 밀도감이 강하다는 점이다. ... 초기 사진들은 현실을 재현하는 '창'이라기보다는 현실을 만지는 촉각장치처럼 느껴진다. 진흙탕에 버려져 구정물이 담긴 찌그러진 주전자 사진이나 생선 대가리만 찍은 사진, 폐허 속에 부서진 자동차 사진, 백열등밑의 설렁탕집 가마솥 사진들은 ... 현실을 휘감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 
김영수의 초기 사진들 ... 1970-80년대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적 흔적들을 담아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 흔적들은 시간의 흐름을 퇴적시키며 죽어버린 순간들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비루한 소재를 심미적인 대상으로 변화시켜 내고 있다. 
김영수 사진의 그와 같은 힘은 사물들과 공간에 대한 그만이 지닌 집중적인 주의력과 애정에서 비롯 ... 인간의 흔적이 담긴 도구들과 사물들, 기계장치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이 바로 그의 초기 사진에서 보이는 두터운 밀도와 현실감을 가능케 하는 동력이 아닐까. 

초기 작품들 중에서 두드러지는 사진들이 사람 사진 .. 활기가 있거나 웃는 표정들로 힘이 있어 보인다. ... 육체가 지닌 특성들이 물씬 배어 있어 생명감이 더욱 실감난다. 그에 비하면 후기의 사진들은 훨씬 정신적이고 사색적인 느낌. 

초기 사진들은 단순한 기록사진은 아니며, 오히려 프루스트의 작품처럼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의 궤적에 대한 미학적인 탐구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듯 싶다. 그러나 김영수의 탐구는 반부르주아적이며, 반고급문화적이다. 민중적이며 대중적이며 민족적 체취가 중층적으로 얽힌 이 치열하고 강도 높은 미학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힘들다. 그와 같은 중층적인 체취로 인해 그의 작품에서는 마치 대중가요의 가락이 울려 퍼지는 것 같고, 때로는 판소리의 현장감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하며, 만취한 상태에서 사물이 열려 보이는 독특한 시각체험이 촉발되기도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