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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시집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_장혜령

흑백사진집 같은 시집이다.
시인은 문장과 문장 사이를 천천히 산책하며 사진을 찍는다.
담백하지만 긴 여운이 남는 시집이다. 

1,2,3부는 내면의 풍경을 담담하게 담았다.
4,5부는 세상을 찍은 다큐멘타리 같다. 
1~3부에서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깨닫는다. 
4~5부에서는 개인의 체험과 감정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중동의 전쟁, 후쿠시마 같은 문제가 나오고 특히 여성의 아픈 삶에 대한 연민이 있다.
시인이 참 참하고 정갈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사소한 메모들
: 한 가지 착상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 보다 서로 다른, 얼핏 서로 엇갈린 생각과 이야기를 병치한다.
그 부딪힘으로 새로움과 긴장을 만들어낸다.
: 내가 화자이지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 한단어로 한 행 또는 한 연을 구성 --> 멈춤의 효과가 있다. 천천히 읽게 한다. 
: 쉼표를 많이 쓴다. 첫문장이 대체로 단문이다. 문장이 간결하게 느껴진다.
: 담백한 문장, 정갈한 마음 
: 이야기 형식, 에세이 같은 시
: 새, 꿈, 흰 불, 검은 돌  



앞부분과 뒷부분에서 각각 한 편씩 뽑았다.

번역자 

이 숲에는
먼나무가 있다
흑송이 있고 물푸레나무가 있다

가지 사이로 새어드는
저녁 빛이 있고
그 빛에 잘 닦인 잎사귀가 있다

온종일
빛이 닿은 적 없던 내부에
단 한 순간
붉게 젖어드는 것이
슬픔처럼 가만히 스며드는 것이 있다

저녁의 빛은
숲 그늘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만들었다

그 속에 
새 그림자 하나

날갯짓 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비릿한 풀냄새가 난다
불타버린 누군가의 혼처럼

이 시각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이곳을 스쳐지나가고 있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꿈속에서
물위에 나를 적는 사람

흔들리면서
내게 자꾸 편지를 보내는 사람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번역자>에서 시인은 숲을 산책하다 저녁노을 지는 것을 바라본다. 새소리와 물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꿈속에서 물위에 나를 적고 내게 자꾸 편지를 보내는 사람과 교감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 그 교감을 번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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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빛은 잘 들어옵니까

이상하지,
세입자가 관리인에게, 그리고
우리가 죄수에게 묻는 질문이 동일하다는 것은

불 꺼진 독방의 내부는
누군가 두고 간
볼펜 잉크처럼 캄캄하다는 거,
의도 없이도 흐른다는 거

처음 타본 비행기와
어깨가 기울어진 한 남자의 뒷모습

그의 휘파람을
존경한다고 교도소장은 말했다
크고 두터운 손으로, 아버지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 바람은 불어옵니까

진주식당의 여자는 국수 대신
빨래를 솥에 넣었고

예수기도회의  붉은 자전거 옆에는
북경반점 오토바이가

모든 질문엔
전학생의 시점으로
생각했지

경도와 위도 선상에서
초조해질 때마다
별들 사이에 길이 있다는 건, 더 확고해졌으니까

동료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삼키는 연습을 하는
수배자처럼

배후가 없는 비밀이 몸속을 떠돌고

깡통 속엔
씹다 뱉은 성냥들이
붉게 차오르곤 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더 말할 것은 없습니까

들판 같은 책상 위로
캥거루 한 마리가 뛰어간다

빛은 잘 들어옵니까
바람은 불어옵니까

이상하지,
가둘 수 없는 것의 안부를 묻는 일

어딘선가
새들의 농담이 들리고

그의 내부를 바라본 것은, 저 나무가 유일하다

<이방인>에서 시인은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아버지 면회를 갔다.
수배자 아버지는 볼펜잉크처럼 캄캄한 독방에 갇혀 있다.
시인은 빛은 들어오는지, 바람은 불어오는지 묻는다.
감옥 밖에 있는 딸의 삶도 간단치는 않았을 것이다.
전학생 같은 삶. 별 사이에서 찾아야 하는 길.
시인은 궁금하다. 아버지는 왜 말을 하지 않을까?
그의 내부에는 어떤 빛과 바람이 있을까?  
나무만이 알고 있는 대답일 것이다. 

2021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