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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시집

i에게_김소연

김소연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
<수학자의 아침>과 <마음사전>에서 꽤 많은 시들과 문장을 필사했다.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소문자 나(i)에게 라는 시집 제목과 달리 
김소연 시인은 나보다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우리, 당신과 같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많은 시를 썼다.
혼자에 매달리는 나와는 달리 그녀의 시에는 등장인물이 많다.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있는 사람
자신에 관한 관심밖에 없는 사람 
자신을 통해 자신만을 만나는 사람
김소연 시인은 그런 개인주의자가 아니다. 
당신을 생각하는 시인
당신을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시인
그런 우리 사이를 생각하는 시인이다. 
김소연 시인은 관계주의자다. 


새장 

가장 훌륭한 죄를 생각해냈다며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어서 당신은 내 앞에 나타났다
무럭무럭 죄가 자라나서 성당 지붕이 뾰족해졌고
지붕을 떼어내 모자로 쓰고 왔다고 당신은 말했다
지을 죄를 미리 생각해두느라 꼬깃꼬깃해졌다고
새가 보고 싶어서
개구리를 꿀꺽 삼키려고 너무 가는 목을
이리저리 젖히는 왜가리를 당신은 그렸다고 했다
당신에게 줄 새장을 손에 들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너무 큰 새를 그린 너무 큰 손으로 당신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머리를 조아렸다
무릎을 꿇고서야 무릎이 생겨났다 


스웨터의 나날

무사하지 않다는 것으로 간신히 무사하다고 소식 전합니다 오늘은 막힌 변기와 친하게 지냈고 마침내 양변기의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싸준 묵은지 한 포기를 도마 위에 올려놓으며 밥에 대한 내 입장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무사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만 이것이 무사하다는 전갈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부엌 쪽창에 얼 비치는 내 그림자를 보면 자꾸 엄마 하고 부르고 싶어집니다 음악가에게 망원경을 주면 우주의 비밀에 대하여 작곡할 수밖에 없다는데 제게 어울리지 않는 것을 좀 보내주시겠습니까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쥘 게 없는 손으로 주먹을 쥐는 나날입니다 도저히 악의적일 수가 없는 호칭을 등에 업고 늦은 밤에 양말을 갭니다 양말에게 짝을 찾아주는 일 정도가 가장 어울리는 나에게도 스웨터에 오래 매달리다 보면 동그란 보풀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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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닌 것 같다.
시인은 말과 말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특히 서로 대립되는 말, 그 대립을 통하여 다시 통합되는 말
이렇게 말과 말 사이의 관계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시인의 언어는 이항대립의 형식을 빌리지만
내용은 기존 관념의 대립에 머물지 않는다.
'무사하지 않다는 말로 간신히 무사하다고 소식을 전'한다.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속에서 대립적 언어의 의미가 뒤집어진다.  
관계와 말은 이야기 속에서 사건 속에서 상황 속에서 재발견된다. 
반어적 의미와 새로운 분위기가 창조된다.  
시인은 말과 말, 사람과 사람 관계의 대립과 통합을 통해
'쥘게 없는 손으로 주먹을 쥐고'
깨달음과 지혜를 시와 삶을 찾는 것 같다. 

'하지 못한 말'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시인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이라고 한다. 
'하지 못한 말'과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은 완전히 반대지만  
후회와 아쉬움이라는 너무나 강력한 마음을 공유한다. 


우산

그녀의 말과 그녀의 말 사이로
나무가 가지를 비틀며 끼어든다
나무가 빠르게 이파리를 펼쳐 보인다
그녀의 말과 그녀의 말이 그늘 속에서 잠잠해진다
그 아래를 천천히 천천히 슬리퍼를 끌며 지나가는 사람들
말들이 피곤을 씻고 길 위에 내려앉는다
말들을 신발코로 툭툭 차며 사람들이 지나간다
말들은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굴러간다
아이 하나가 뒤뚱거리다 넘어진다
말 하나를 손안에 넣고 다시 일어선다
말 하나가 조금 더 멀리 날아간다
그녀의 말과 그녀의 말 사이에
내 말을 몰래 넣어둔다
하지 못한 말이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과 함께
나뭇가지 끝에 매달리기 시작한다
이 그늘을 지나가며 사람들이
저마다 우산을 펼쳐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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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잘 될 겁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그걸 모르겠습니다.
잘 살 거예요. 누가요. 우리는 잘 살 거예요. 어떻게요. 그건 모르겠지만요.

나는 당신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신과 친했던 적이 있었어요. 당신에 대해 아주 잘 알았습니다. 열 손가락에 각인된 지문을 살펴보며 낄낄댔던 장면이 기억나요. 실은 그것만 기억이 납니다. 당신을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을 못 믿겠어요. 멍청이들이나 기억을 믿을 겁니다. 실은 멍청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당신과 친했던 적이 있었는데 당신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멍청이가 되기전까지는 기꺼이 멍청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눈 대화가
전부 폭력이었다고 두려워하는 사람 앞에서
그것이 무엇이었든 우리가 누구였든

대화한 적 없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경험한 적 없는 경험에 대한 그리움에 휩싸입니다.

알고 계실 겁니다. 무엇을요. 모든 것을요. 이렇게 되어야 했던 것을요. 누가요. 그걸 모르겠습니다.
나는 할 겁니다. 무엇을요. 무엇이든요. 어떻게요. 방법은 없지만 어떻게든. 방법이 없다는 것과 방법은 있지만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얼마큼 다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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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그리고 말은 어긋날 때가 많다. 
관계는 항상 좋은 게 아니다. '대개' 틀어진다. 기억은 믿기 싫은 것, 경험은 경험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될 때가 있다. 심지어 우리의 대화가 폭력이 되기도 한다. 
말은 '대개' 미끄러진다. 말은 생각과 느낌을 정확히 담아내지 못한다. 서로 다른 말을 하고 모를 말을 하고 동문서답한다. 시인은 끊임없이 관계에 대해 그리고 말에 대해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