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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시집

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_민구

익숙한 것이 좋고 새로운 것은 두렵다. 모르겠다. 싫다.  
딸에게 새로운 음식을 먹이는 건 참 힘든 일이다.
아재 입맛인데도 처음 보는 식재료, 음식은 절대 먹지 않는다.
어르고 달래서 한 입 먹여보아도 반응이 대체로 시원찮다. 
다시 익숙한 음식, 좋아하던 음식에만 젓가락이 간다.
내게 민구의 시는 익숙함과 새로움 그 경계에 서 있다. 

시에 관한한, 내가 보수주의에 빠져 있는 게 아닐까 고민한다. 
미래파의 대유행 이후로 새로운 시인들의 신작시집에 손이 가지 않는다.
모두가 감탄한다는 황인찬의 문장은 유치해 보이고
최근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시집들을 읽으면 
'김수영은 이걸 읽고 무슨 생각을 할까'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 나도 민구의 시는 읽을 수 있다. 
나를 포근하게 어루만지거나 날까롭게 찌르지는 않지만 
피식 웃기도 하고 감탄도 한다.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공감하지도 못해도
어슴프레 무언가 보일 듯 만져질 듯 하다.
어렵지 않은 시어와 쉽고 단순한 문장의 힘인 것 같다.
그래도 아직 나에게는 연과 연 사이의 징검다리가 너무나 멀다.
나는 여전히 숏다리다. 제기랄!! 

징검다리를 밟지 않아도 그냥 발을 물을 담그며 건너도 좋았던 시 두 편을 골랐다. 


<신작>

새로 쓴 건 
시가 되지 않았다

새로 만난 이도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은
여전히 낯설고

모두가 감동했다던 영화는
세트장을 완벽하게 옮겨놓은
작은 상자 같다

어제는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하다가
쓰지 않는 그릇을 밖에 내놓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한 번도 신지 않은 양말은
꿈속에서 발을 구르고

방 안에만 있던 오늘은
왜 이렇게 저리는지
나는 멀쩡한 무릎을 주무른다

내일 아침에는
벼룩시장에 갈 것이다

앵무새를 꺼내놓고
당신이 할 말을 외우고 있는 
이 새가 팔리기를 기다려야지

날씨가 좋으면
바다가 한 줄씩 차오르고

당신은 파도 너머로 튀어 오르는 
서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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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두 연이 특히 참 좋다. 시가 한 줄씩 차오르는 모습, 서퍼처럼 파도너머 튀어 오르는 시.
습작을 하는 나로서는 너무 공감 가는 상황이고 장면이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일상에서 꿈속에서, 시란 시쓰기란 얼마나 답답한 것인가.
그러나 날씨가 좋으면 바다가 차오르고 그 위로 서퍼가 날아오를 것이다.
야호~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주변의 모든 것>

주변을 둘러보면
익숙한 것들

덜 자란 화초
오래된 야구 글러브
독일에 다녀온 친구가 선물한
폭스바겐 모형 자동차

그들은 어울리지 않아서
언제나 조용해

나는 책을 덮고서 눈을 감는다

그리고 나의 주변,
책상 언저리에 있던 모형 자동차가
중립 기어를 푸는 걸 보고서 흐뭇해진다

미래에게 쓴 편지가 오지 않은 이유
크리스마스 양말 한 짝이 사라진 이유
그리고 그 사람이 내 곁에 없는 이유를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깍지 낀 손 안에 있던 사랑과
주머니에서 꿈틀대던 우정이
이제는 나를 쥐고 있다

금이 간 유리잔에는
햇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너는 왜 쏟아지는 것들의 이름을 떠올리는 걸까?

건조대에 세워놓은 접시는 말한다

여기 빛나는 게 있다고
흐르는 빛을 닦아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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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다가 건조대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접시를 보았다.
나는 말한다. '아이참, 뒷정리를 제대로 해야지!!'(집안일 중 설겆이는 아내 몫이다)
시인은 말한다. '여기 빛나는 게 있다고 흐르는 빛을 닦아 달라고'
시인의 감수성이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저 감탄할 뿐이다. 
어쩌면 시인은 아내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사랑과 우정은 금이 가기 쉬운 것이니까.
주변에서 침묵하고 있는 것들, 그 익숙한 것들이
새로운 것들, 사라지는 것들보다 더 빛날 수 있다.
정말?
과연 그럴까?
그런 상상을 하기엔 화초, 야구글러브, 모형자동차, 접시가 내게는 너무 사소하다.
일상의 사물 속에서 빛나는 것은, 그 속에서 흐르는 빛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