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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시집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_문태준

시집을 열면, 첫 글은 시인의 말이다. 이런 구절이 있다.

"시가 누군가에게 가서 질문하고 또 구하는 일이 있다면 새벽의 신성과 벽 같은 고독과 높은 기다림과 꽃의 입맞춤과 자애의 넓음과 내일의 약속을 나누는 일이 아닐까 한다." 
시인에게 중요한 것들, 시인에게 시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들을 나열한 것일테다. 

시집의 세번째 시, <어떤 모사>를 읽고 나는 시인이 시를 통해 무엇을, 또 어떻게 표현하려고 하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 시집은 정말 담백한 저염식 채식 같은 시집이다. 시의 온도는 조금 따뜻한 정도, 미지근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게다가 양도 적다. 몇 줄 되지 않는 시들이 꽤 많다. 한페이지가 넘는 시가 딱 한 편이다.

시인은 마른 풀잎의 엷은 그림자 같은 시를 쓴다. 그의 시에서 소리는 작고 빛은 부드럽고 형태는 가늘고 맛은 싱겁다. 옛날은 그만해도 좋은 생각이고 미래는 단조롭다. 


<어떤 모사>

마른 풀잎의
엷은 그림자를 
보았다

간소한 선(線)

유리컵에
조르르
물 따르는 소리

일상적인 조용한
숨소리와
석양빛

가늘어져 살짝 뾰족한
그 끝
그 입가

그만해도 좋을
옛 생각들

단조롭게 세운 미래의 계획
저염식 식단

이 모든 것을 
모사할 수 있다면

붓을 집어
빛이 그린 그대로
마른 풀잎의
엷은 그림자를
따라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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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꽃, 돌, 새, 물, 산, 바다, 해, 달, 하늘 같은 자연에서 시를 길어 올린다. 너무 흔하고 아주 식상한 소재들에서 작지만 반짝거리는 시의 마음을 찾아낸다. 모래에서 황금을 찾아내는 사금파리같다. 내 마음을 움직인 시 가운데 돌에 대한 시가 있다. 

<입석(石)>

그이의 뜰에는 돌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 돌을 한참 마주하곤 했다
돌에는 아무 것도 새긴 게 없었다
돌은 투박하고 늙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나는 그 돌에 매번 설레었다
아침햇살이 새소리와 함께 들어설 때나
바람이 꽃가루와 함께 불어올 때에
돌 위에 표정이 가만하게 생겨나고
신비로운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그리하여 푸른 모과가 열린 오늘 저녁에는
그이의 뜰에 두고 가는 무슨 마음이라도 있는 듯이
돌 쪽을 자꾸만 돌아보고 돌아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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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에 설레본 적이 있었던가? 돌과 사람이 만나면 미친사람이거나(돌아이) 멍청하거나(돌대가리) 무신경하거나 (돌덩이) 대체로 부정적 인상을 많이 받는다. 게다가 반도체 시대에 돌 따위는 정말 별 거 없다. 게다가 아무 것도 새긴 게 없는 자연석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새긴 게 없는 돌이기에 아침햇살과 바람을, 새소리와 꽃가루를 껴안을 수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신비로운 목소리를 가질 수 있다. 특별한 모양이 없기에 자꾸만 돌아보게 할 수 있다. 어쩌면 돌을 세운 그이도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푸른 모과가 열리고 마음을 두고 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돌은 조용하지만 단단하다. 흔들리지 않는다. 나도 마음속에 돌을 세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푸른 모과', 이토록 모과가 신비로울 수 있다니!! 새로운 내용과 형식만이 예술이, 시가 아니다. 시의 장인은 돌에 설레임을 느끼게 하고 모과로 신비로움을 표현한다.

<나의 쪽으로 새는>

나의 가늘은 가지 위에 새 두 마리가 와서 울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창을 조금 더 열어놓았습니다
새의 울음은 나의 밥상과 신발과 펼친 책과 갈라진 벽의 틈과 내가 사랑했던 여인의 뺨 위에 눈부시게 떨어져내렸습니다
나는 능소가 핀 것을 보고 있었고 새는 능소화의 웃음속으로 날아갔습니다
날아가더니 마른 길을 끌고 오고 돌풍을 몰고 오고 소리를 잃은 아이를 데려오고 가지꽃을 꺽어 오고 그늘을 깎아 오고 늙은 얼굴과 함께 오고 상여를 메고 왔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것들은 하나의 유원지처럼 환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하나의 고음(音)이었습니다
어떻게 그 크고 무거운 것들을 아득한 옛날로부터 물고 오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것들과 함께 와서도 나의 가늘은 가지 위에 가만히 올라앉아 있었습니다
나의 쪽으로 새는 흔들리는 가늘은 가지를 물결을 밀어 보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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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은 가지를 새에게 내준 사람, 울고 있는 새에게 창문을 조금 더 열어주는 사람. 새는 그런 사람에게 날아온다. 그런 사람의 일상 속에 눈물과 웃음을, 환한 빛과 높은 소리로 함께 한다. 새가 날아와 가늘은 가지 위에 앉아 있어도 물결을 밀어 보내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계속 파랑새를 찾아 다니지만 둔감해 느끼지 못할 뿐, 새는 나의 가장 가늘은 가지에서 가만히 물결을 밀어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집 제목이 정말 아쉽다. 시집과 시인의 정서와 참 멀다. 시인이 붙인 시들의 제목은 대체로 시인의 시를 닮아 담백하다. 물론 이 제목은 시인이 쓴 시의 한 구절이지만, 왠지 다른 시집의 성공을 맛 본 편집자의 고집이 아니었을까 하는 근거없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