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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시집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_리 산

센티멘털 노동자 만세!!
시인은 <센티멘텔 노동자 동맹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비밀결사조직이라고 또는 실체가 없는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더 찾아보니 박정대. 강정 시인 등이 함께 활동 하고 있다.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 구성원이기도 하다. 
리산의 시는 시공간을 휩쓸고 다닌다. 시 속에 나오는 공간은 유럽의 어느 작은 여관, 눈내리는 탄드라 국경지대, 중국의 천산과 아라비아의 모래사막, 히말라야 산맥과 집안의 식탁 위, 고속도로 그 어디로든 널뛴다.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이국의 낯선 지명과 낯선 환경이 시의 분위기를 만든다. 게다가 시 속에서 시간은 현재, 과거, 미래를 넘나든다. 수천년 전의 세계와 지금의 세계가 교차한다. 시공간뿐만 아니라 철학과 사상과 이념과 언어, 예술, 장르 또한 뒤섞인다. 


혼종교배의 시공간, 예술과 철학을 넘나들며 리산 시인의 시들은 새로운 느낌과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도 시가 너무 난해하거나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시의 내용과 분위기가 낭만주의적으로 '센티멘탈' 하다. '애이불비'와 '측은지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시에 나오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입술을 가진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손톱을 가진 여자'같은 이들이다. 
한편, 내가 느끼는 아주 큰 동질감은 '음식-밥과 술' 때문이기도 하다. 센티멘탈에 어떻게 애인과 술과 밥이 빠질 수 있겠는가?    
좌파와 혁명가들, 혁명 사상에 대한 언급은 와 닿지 않았다. 깊은 경험과 고민을 곱씹으며, 그 내용과 실체를 파악했다기 보다 그저 낯설고 뭔가 있어보이는 장식품으로 쓰인 것 같다. 물론 낭만에서 혁명 같이 좋은 대상이 어디있겠는가. 

시인은 여는 시로 '말', '언어를 통한 소통'에 대해 깊은 불신을 드러내는 시, <오드아이>를 배치했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이며 앞뒤가 딱딱 들어맞는 말들이 소통을 가져오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통은 말 없이도, 침묵으로도 가능하다. 시인은 이성적 사고와 이성적 언어를 깊이 불신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논리를 뛰어넘고 시공간과 예술과 철학과 이념을 넘나들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듯한 시를 쓰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너바나>(화양연화), <어느날 삐아프와 꼭도가>(라비앙로즈), <인디 시인에게 무상급식을>(최고은작가), <폭풍추적 전문가>(동사서독) 같은 시들은 시인의 감수성이 물씬 풍긴다. ( )안은 시를 읽으며 내가 떠올린 영화나 사람들이다. 낭만은 원래가 쓸쓸하다. 
<국경수비대>라는 같은 제목을 가진 몇 편의 시들이 있다. 국경수비대를 소재로 꽤 많은 시를 썼는데, 내게는 다가오지 않았다. 국경은 센티멘탈 하지 않다. 국가와 민족은 낭만이 아니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닫는 시로 시인은 자신의 이름이 제목인 시, <리산>을 골랐다. 이름이 존재라면, 밥 말리가 자기 이름이 아니라 말했다( <리산>도 아직 <리산>이 아닌걸까?) 경성을(고향?) 떠나 조국의 눈 내리는 험한 들판을 달려와(먼먼 젊음의 뒤안길?) 비로소 귀환하는 것 같은 들판의 집(거처를 찾았나?), 그 집의 문 안에는 눈구름 산이 보인다. 이지러지고 뭉개진 산(거처라 생각했으나 새로운 여행일뿐?) 

시인의 다음 시집을 주문했다.  

<오드아이>

우리는 말을 했다, ... (중략)

우리는 말을 했다, ... (중략)

우리는 말을 했다, 패치워크로 감싼 주전자에 두고두고 따뜻한 차를 내려 마시며 우리는 말을 했을 뿐인데, 가슴에 꽃힌 칼날들은 다 어디서 온 걸까 이건 또 무슨 풀지 못한 난수표처럼 우리가 깨닫지 못한 채 사멸돼가는 고대의 언어인걸까 우리는 말을 했다, 서로 다른 구석을 그리워하는 멧새떼처럼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점령군처럼 우리는 말을 했다


<너바나>

언덕을 넘어 외곽으로 가는 마지막 전차의 종소리도 그친 자정이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입술을 가진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손톱을 가진 여자가 모여드는 자정 너머 술집에 불이 켜지지

누군가와 어깨를 걸고 먼 곳에서 먼 곳으로 가고 싶은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남자와 금이 간 청동의 술잔에 제 손금을 비추어 보는 여자가 있는 그곳에는, 유효기간이 지난 달력을 찢어 불이 꺼진 화덕에 불씨를 살리고 밀봉된 병 속의 시간을 헐어 작고 단단한 주전자 가득 끓여내는 뜨겁고 진한 국물이 있지

지금 막 일인분의 따뜻한 음식을 사기 위해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는 남자와 뜨거운 김이 오르는 노점 식당 앞에 서서 청어 향수가 뿌려진 손수건으로 지워지지 않는 이마의 허기를 닦는 여자

머리 가는 밤새들 울음 우는 긴 모퉁이 지나 자정 너머 술집에는, 낡은 앨범 속 램프에 그을린 가수의 목소리 흥얼흥얼 타오르는 자정 너머의 화덕, 오래도록 식지 않을 한 스푼의 온기가 있지


<어느 날 삐아프와 꼭도가>

두런두런 말소리 담장에 번지는
저녁 골목을 지나네
꼭 한번만 들어가 살고 싶은 담쟁이넝쿨 집엔
누가 사는 걸까 불빛 하나 없이
컴컴한 창문가를 서성였네
내 이름을 부른 적도 없는데

흙길에 난 발자국 속으로 스미는 눈 물
돌아보면 지나온 길들은 어쩌자고 그렇게 아름다운지

마다가스카르의 눈 내리는 밤 따위는
다시 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어딘가 있을지 모를 그런 밤을 찾아
그런 밤 오래된 호텔에 묵었을지 모를
늙은 여가수에게 장미꽃을 바치는
마지막 팬이 되어
서글피 우는 사내의 블루스가 되어
이제는 울지 않는 작은 새나 울어야지

북쪽엔 눈이 있고 남쪽엔 해가 있다는
캐러멜 초콜릿 봉봉 같은 말들
어슬렁거리기 좋은 모퉁이를 찾아
속절도 없이 시시한
건달이나 돼야지


<인디 시인에게 무상급식을>

은빛으로 빛나는 돔 아래 작은방에 있는 듯했지
세계의 지붕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저기 어느 나라에는 지붕 마이스터라는 직업도 있다 하네

나는 무슨 애이불비의 마이스터가 되어
휴가의 마지막 밤 센티멘털 노동자들은 어떤 노래를 듣나
태생이 계면조인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를 듣는 밤
이제는 문을 닫고 추억 속으로 사라져간
배고픈 저녁이면 찾아가던 밥집과
화덕에 불을 피워 음식을 내던 식당과
지난해 마지막 눈을 바라보던 나무 창문 안 자리와

나는 무슨 측은지심의 마이스터가 되어 생각하네
미열에 시달리는 토요일 저녁
서랍 속 마지막 아스피린도 떨어지고
으슬으슬 해열제를 찾아 거리로 나서면
세상엔 온통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사람들 사람들

그럴 때 당신은 어떡하나
나는 무슨 센티멘털의 마이스터가 되어
불멸의 좌파에게 맥주를 부어주던 밤들이 자꾸 생각나
테이블에 올라가 장미꽃 마술을 부리던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넣던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아무것도 아닌 고독이

비무정 비슬픔 비애인 셀라비


<폭풍추적 전문가>

그때 너는 내 몸에 감기던 수초였을까
강기슭에 오래오래 묻혀 있다
내 주머니 속으로 담겨지던 이끼 뒤덮인 돌멩이였을까

몇 번째의 생이었는지
그 강가에서 나는 너를 만난 적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 죽는 장면을 쓰던 밤
비 오는 미라보 다리 위를 밤새 울며 서성였다는 너를 기억한다
나는 그때 그 다리를 지나 더 먼 강으로 나아가던 그날의 마지막 배

나무에서 떨어진 어린 새를 보랏빛 제비꽃 아래 묻던 여자아이
한 생이 끝나고 또다른 생을 시작하려는 죽은 새의 뜬 눈

내가 히말라야산맥에 깃든 성스러운 나무를 오르며 몇 통의 꿀을 모으고 있을 때
너는 천산의 여름 들판 천 개의 꽃들 사이에 벌통을 놓고 있었다
그때 내 머리칼을 간질였던 건 한입의 꿀을 베어 물며 웃던 먼 곳의 웃음소리

또 언젠가의 너는 푸른 젤리를 만들어 식탁 위에 올려놓고
네가 가장 아끼는 모자를 쓰고 구두끈을 매었다

텅 빈 식탁을 쏘아대던 한낮의 햇살을
통째 녹아 식탁 아래로 흘러내리던 끈덕진 육신을

달콤하게 얼어붙은 푸른 별빛 속에서
늑대와 같이 우는 사람의 울음소리를
야회가 끝난 새벽 거리 혹독한 추위를 나는 기억한다

그후로도 여러 겹의 생이 지났다
밤의 호랑이에 관한 예언서 갈피 속으로
마술사의 모자에서 날아오르는 비둘기 날개 속으로
사람과 고양이의 시간 사이로

몇 번째의 생이었을까
너는 나를 만난 적이 있다


<리산>

밥 말리는 제 이름이 아닙니다
저는 아직 제 이름을 알지도 못합니다
1976년의 밥 말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경성을 떠나왔습니다
조국의 들판은 겨울이 한창이고
일생에 단 한 번 험한 길을 여행하고
다시는 되돌아가지 못했다는
낙타며 노새 들 생각이 났습니다

눈벌판을 내내 달려와 반쯤 멀어버린 두 눈에
산림조합 산불조심 흰 기둥에 쓰인 초록 글씨가 보이면
비로소 귀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은 안개처럼 풀어지고
짐작으로만 알 뿐인 짐승들 검은 울음소리
겨울 숲을 떠나 배고픈 새들이
또다른 겨울 숲으로 허기져 날아갑니다

떠돌이 이야기꾼의 끝내 헛것일 뿐인 이야기에 취한듯
두고 오다와 남기고 오다의 차이를 생각하며 지나가는 한 시절

땔감을 울타리처럼 쌓아놓은 들판의 집에선 종일 연기가 오르고
그 문의 안쪽으론 눈구름을 머리에 인 산이 보입니다
이지러지고 뭉개진 채 꿈에서도 제 경계를 보이지 못한 산
그래서 나도 묻지 않았습니다
담배가 없으니 울지도 못하고